점심시간이면 정동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돌담이 품어낸 정동길은 특별한 정취를 자아낸다. ‘정동길’은 한국 근현대 문화유산의 출발지다. 최초의 근대 교육이 시작된 배재학당, 이화학당이 자리하고 있다. 최초의 여성병원(보성여관)이 설립된 곳이며, 첫 민간 신문사(신아일보)가 있던 곳이다. 정동제일교회는 개신교의 세례가 처음 베풀어졌던 곳이고, 정동길의 국립정동극장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 ‘원각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건립된 공연장이다. 근현대 문화유산을 오롯이 담고 있는 정동길은 말 그대로 ‘걷고 싶은 길이자 걷기 좋은 길’이다. 붉은 벽돌이 인상적인 정동교회와 옛 신아일보사별관은 세월과 시간을 품어낸 건축물로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길 사이로 뻗어 나간 은행나무들과 궁으로 이어지는 길의 기운은 걷고 있어도 걷고 싶게 하는 힘이 있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정동공원과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총 120m의 길은 ‘고종의 길’이라고 부른다. 아관파천 당시 고종의 피난길로 2018년 10월에 정식 개방됐다. 나는 이 길을 참 좋아한다. 지금은 고요하기만 한 이 길이 품은 사연 때문일까. 걷다 보면 흘러간 시간과 지금, 그리고 앞으로에 대한 여러 복잡한 심경과 생각들이 뒤를 따른다.
문득 100년 전이 궁금해졌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당시의 인류도 ‘스페인 독감’이라는 바이러스를 만났다. 100년 전 유례없는 감염병으로 많게는 전 세계 인구 중 1억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우연히 보게 된 그때의 사진 속 사람들도 지금의 우리처럼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것이 놀랍다. 100년 만의 팬데믹에 100년 전 유사한 감염병의 역사는 지금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스페인 독감과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1920년대 미국과 유럽은 경제와 문화적 부흥의 시기를 맞이했다. 이를 두고 ‘광란의 20년대(Roaring 20’s)’라고 표현한다. 최근 여러 경제 전문가가 100년 전의 현상을 다시 주목하고 있다.
100년 전을 궁금해하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묘한 위로가 샘솟는다. 인류 역사 속 지금과 같은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 다행스럽다. 역사의 과정에서 인류가 터득한 혜안을 통해 다가올 미래의 희망이 엿보인다. 지금 우리의 불안함은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끝은 온다. 언젠가 지금의 팬데믹을 이겨낸 우리가 100년 뒤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남길 날이 오게 될 것이다. 따스한 햇살과 간혹 멀리서 새 우는 소리만 들려오는 평온하고 고요한 ‘고종의 길’을 지금의 내가 누리듯 그날은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