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식은 중독"…식탐 못참는 비밀 풀렸다

입력 2021-10-15 16:44
수정 2021-10-15 23:54
고혈압 당뇨 등 수많은 질병의 원흉인 고도비만이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한국의 비만율은 2007년 31.7%에서 2019년 33.8%로 12년 동안 2.1%포인트 늘어나는 데 그쳤다. 하지만 고도비만은 2009년 3.5%에서 2018년 6%로 9년 새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체질량지수(BMI)가 35 이상일 때 진단받는 고도비만 환자의 당뇨 발생 위험은 정상인의 4배, 고혈압 발생 위험은 2.7배에 이른다.

과식은 고도비만을 부르는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고도비만 판정을 받은 환자의 상당수는 “과식하는 게 습관이 되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살이 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생활 방식만 바꾸면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과식 습관’을 바꾸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과식할 때 활성화되는 뇌세포가 알코올 또는 약물 중독 때 활성화되는 뇌의 영역과 강하게 연결돼 있다”는 미국 워싱턴대 의대 연구진의 연구 결과가 지난 7일 국제학술지 ‘뉴런’에 발표된 것. 과식은 습관을 넘어 ‘중독’에 가깝다는 의미다.

워싱턴대 의대에 따르면 ‘글루타메이트성 뉴런’이라고 불리는 이 뇌세포는 글루타메이트라는 흥분성 신호전달물질에 반응한다. 연구진은 이 뉴런이 뇌의 복측피개영역과 활발하게 신호를 주고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복측피개영역은 중독을 일으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부위다. 약물과 같은 보상 자극에 의해 이 부위가 활성화되면 기쁨, 동기부여 등에 관여하는 도파민이 분비된다. 이런 보상 경로가 반복적으로 활성화되면 중독에 이르게 된다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다.

가레트 스튜버 워싱턴대 의대 교수는 “연구 결과 과식(섭식 장애)을 일으키는 뇌 회로가 중독을 일으키는 뇌 영역과 큰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스튜버 교수는 지난 10여 년간 통증, 중독, 섭식 장애 등에 관한 뇌의 작용을 연구해왔다.

연구진은 과식이 중독행동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섭식 조절 호르몬으로 알려진 렙틴과 그렐린의 영향을 추가로 연구했다. 렙틴은 뇌에 ‘배가 부르다’는 신호를 보내 식욕을 억제하는 호르몬이다. 그렐린은 반대로 뇌에 ‘배고프다’고 알려 식욕을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연구진은 렙틴이 복측피개영역의 활성을 증가시키고, 그렐린은 활성을 떨어뜨린다는 것을 확인했다. 과식했을 때 분비되는 렙틴이 마치 약물과 같은 보상 자극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스튜버 교수는 “글루타메이트성 뉴런을 표적으로 하는 치료가 과식으로 인한 비만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하지만 먼저 뇌의 다른 부분에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는지 안전성부터 검증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고도비만을 막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과식으로 인한 보상 경로를 서서히 사라지게 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뇌는 지속적인 행동과 습관에 따라 변하는 ‘뇌 가소성’이라는 특성이 있다. 과식을 점진적으로 줄이고 운동 등을 통해 도파민 분비를 늘리는 방식으로 새로운 보상 경로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뇌의 가소성은 성인보다 청소년에서 더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인이 새로운 보상 경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청소년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얘기다.

최지원 기자 jwcho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