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6일 총선 이후 독일에선 차기 연립정부 구성을 위한 논의가 한창이다. 총선에서 신승을 거둔 중도 좌파 성향의 사회민주당(SPD)이 주도하는 ‘신호등’(사민당-빨강, 자민당-노랑, 녹색당-초록) 연정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녹색당이 제3당으로 약진하면서 연정 협상의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는 까닭에 독일 차기 정부는 ‘기후 위기’와 ‘친환경’에 더욱 큰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서점가에서는 하랄트 벨처 교수의 신간 《나 자신을 향한 부고(Nachruf auf mich selbst)》가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벨처 교수는 독일을 대표하는 사회심리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 플렌스부르크대에서 ‘전환설계학(Transformations Design)’을 가르치고 있다. 전환설계학은 최근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분야로, 지속가능한 미래로의 전환을 위해 개인과 사회의 변화 방향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소비주의와 산업주의에 기초한 기존의 생활양식을 벗어나 미래 생존을 위한 인류의 대안적 생활양식에 관한 연구를 수행한다. ‘나 자신을 향한 부고’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통해 벨처 교수는 개인과 사회 모두 시급하게 ‘정지의 기술’ 또는 ‘중단의 지혜’를 배워야만 한다고 제안한다.
성장 중심의 자본주의 문화에는 ‘정지’라는 개념이 없다. 그래서 미래에 자동차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계속해서 고속도로를 만들고 있고, 비행기가 없을 수 있는데도 대규모 공항을 건설하고 있다. 지난 세기 경영의 목표였던 ‘최적화’와 ‘효율화’가 잘못됐고 각종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 확인됐지만,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방법으로 미래의 문제에 대처하려고 애쓰고 있다.
자본주의적 팽창의 문화에 익숙해져 지구 자원과 생태계의 유한성을 애써 무시하면서 최적화와 효율화를 외치고 있다. 이 책은 이제는 지난 세기의 생각과 가치를 향해 사망 선고를 내려야 한다고 선언한다. “멈추면 그동안 성취한 것을 유지할 수 있지만, 계속하면 성취한 것조차 모두 사라지게 된다”면서 지금 과감히 중단하고 중지함으로써 미래 세대의 삶과 지구 생태계를 더 낫게 만들 가능성을 찾아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책은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돌연한 출발》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는 마구간에서 말을 끌어내오라고 명령했다. 하인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몸소 마구간으로 들어가 말에 안장을 얹고 올라탔다. 먼 데서 트럼펫 소리가 들려왔지만, 하인은 그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주인님.’ ‘모른다.’ 내가 대답했다. ‘그냥 여기를 떠난다. 그냥 여기를 떠날 뿐이야. 그래야만 나의 목표에 다다를 수 있다.’ ‘그렇다면 주인님의 목표를 아시고 계시는 거죠?’ 하인이 물었다. ‘그럼.’ 나는 대답했다. ‘내가 여기를 떠난다고 했으니 그것이 곧 나의 목표다.’”
‘그냥 여기를 떠나는 것이 목표다.’ 벨처 교수는 카프카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인처럼 돌연 멈추고 떠나는 것이 해답이 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과학적인 증거, 심리학적인 통찰력, 다양한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우리 주변에 팽배한 발전과 성장의 부조리로부터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는지 알려준다.
홍순철 < BC에이전시 대표·북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