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자국의 국내총생산(GDP)을 기준으로 40~50%를 넘어서는 국가가 나타나면 손을 본다는 가설은 그럴듯하다. 소련, 일본, 중국을 차례로 대입시켜 보면 말이다. 특허로 눈을 돌리면 더 극적인 장면이 그려진다. 1957년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 발사 당시 소련은 세계 최다 특허 출원국이었다. 충격을 받은 미국은 엄청난 과학기술 투자로 소련을 따돌렸다. 이후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다 특허 출원국으로 부상한 국가는 일본이었다. 미국은 1985년 플라자합의 등으로 일본을 밀어냈다. 지금 세계 최다 특허 출원국은 중국이다. 미·중 충돌은 올 게 온 것이고, 그 핵심은 기술이다.
미국 행정부가 삼성전자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에 민감한 영업정보 제출을 요구했다. 정부는 ‘대외경제안보 전략회의’를 열어 논의하겠다지만 뾰족한 대응책이 나올지 의문이다. 다음달 8일까지 공급망 정보를 제출하라고 통보받은 기업들만 전전긍긍하고 있다.
문승욱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국정감사에서 “(미국의 요구가) 통상적인 상식으로는 이례적인 조치”라고 했다. 이례적인 조치로 치면 조 바이든 행정부가 처음이 아니다. 직전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외국산 자동차에 무역확장법 232조 적용을 검토하라고 지시한 것부터 통상적인 상식을 깨는 조치였다. 당시 글로벌 자동차회사들은 모든 정보를 미국에 제공했을 것이다. 지나 러만도 미국 상무부 장관은 “반도체 기업의 자발적인 정보 제공”이라고 했지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필요 시 국방물자생산법(DPA)을 발동해 자료 제출을 강제할 수 있다”는 경고가 따라붙었다.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정권이 교체됐지만, 미국의 ‘트럼프주의’는 더 정교하게 진화하는 양상이다. 소련 붕괴 이후 우리가 알고 있던 미국이 아니다. 이례적인 조치들이 미국 산업정책의 전형으로 굳어지는 양상이다.
미국의 반도체 정보 요구 대상에 국내 기업이 들어간 이유는, 한국의 독보적인 반도체 생산기술 우위가 공급망을 강화하려는 미국으로선 전략적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반도체 굴기’를 포기하지 않는 중국 입장에서도 그렇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남중국해 등 민감한 사안이 논의됐는데 중국이 반응을 자제한 이유도 미국의 공격을 받는 형국에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인정한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정부가 좋아하는 ‘전략적 모호성’은 미·중이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인정할 때나 유효하다. 어느 한쪽에서 더 이상 아니라고 하면 전략적 모호성의 수명도 다할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미국이 국내 공급망 강화를 끝낸 뒤가 더 두렵다.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유지될 것이란 보장이 없어서다. 반도체 공장 건설이 한국에서는 온갖 장애물로 지연되고 있지만, 공급망 확충이 국가 최우선 과제인 미국에서는 신속히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3년, 늦어도 5년 안에 반도체 공장이 건설돼 돌아간다면 한국에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여기에 한·일 관계는 최악이다. 미국·대만과의 동맹라인을 그리는 일본은 틈만 나면 한국이 ‘중국으로 기술이 유출되는 길목’이란 인식을 미국에 각인시키는 것 같다. 한국의 반도체산업을 겨냥한 수출규제도 중국의 미·일 안보 위협을 사전에 차단한다는 논리로 미국의 묵시적 동의를 구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정부가 강대국들과 똑같은 조치로 맞대응에 나서라고 주문하는 게 아니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한국이 거대한 자국시장을 레버리지로 활용하는 미·중의 안보 논리를 그대로 차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점도 안다. 그렇다고 이게 무기력한 정부 대응의 변명이 될 수는 없다. 미·중 충돌로 상황이 꼬일수록 정부와 기업이 머리를 맞대 고도의 전략으로 헤쳐나가야 한다. 정부와 기업 간 신뢰 관계가 지금처럼 최악인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일본의 수출규제에 놀란 정부는 뒤늦게 소재·부품·장비 연구개발 투자에 다시 불을 붙였다.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정보 요구는 향후 더 큰 후폭풍의 예고탄일지 모른다. 백 번을 생각해도 미국과 중국이 한국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는 전략적 핵심기술을 확보하는 것 말곤 다른 선택지가 없다. 국가 생존이 걸린 과학기술에 정면 승부를 걸고 통상외교 전략도 이에 맞춰 새로 짜야 할 순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