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 1200원은 한국 경제의 위기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을 했다. 과거에는 글로벌 금융위기 등이 불거질 때 환율은 1200원을 뚫고 올라갔다. 하지만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체력) 지표는 2008년 이후 가장 양호한 축에 속한다. 하지만 미국 중앙은행(Fed) 통화정책 변화, 글로벌 인플레이션 우려, 흔들리는 중국 경제를 비롯한 한국을 둘러싼 상황은 어느 때보다 엄중하다. 불확실성이 커지는 만큼 기업이 그만큼 달러를 시장에 풀지 않으면서 달러 오름세를 부추기고 있다. 이 같은 리스크들이 겹치면서 환율은 1250원까지 치솟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13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8년 1월 1일부터 이날까지 평균 원·달러 환율은 1137원으로 집계됐다. 이 기간 최저가는 글로벌 금융위기 전인 2008년 1월15일 기록한 달러당 935원70전이다. 최고가는 금융위기 한복판에 들어선 2009년 3월2일 1570원30전이다.
위기의 경계선은 통상 환율 1200원선으로 받아들여졌다. 1200원을 돌파한 시점은 글로벌 금융위기 영향을 받던 2008년 9월~2009년 9월, 유럽재정위기가 전세계를 덮친 2010년 1~5월, 중국 인민은행이 위안화를 전격 평가절하하기 전후인 2015년 9월~2016년 12월에 환율은 1200원을 넘어섰다. 최근에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분쟁과 일본의 수출규제가 겹친 2019년 8~10월, 코로나19 위기가 퍼진 지난해 2~7월이었다.
전날 환율은 평균 환율을 훌쩍 웃도는1198원80전에 마감했다. 오전 장중에 환율은 1200원 40전까지 치솟았다. 이날도 당국 개입과 외국인이 줄다리기 하면서 1190원~1200원선을 맴돌 전망이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위원은 "과거에는 환율 1200원이 '넘사벽'(넘을 수 없는 벽)으로 간주할 만큼 이 가격을 뚫기 쉽지 않았다"며 "오버슈팅(일시적 폭등)하는 움직임에 따라 연내 1250원선을 뚫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안영진 SK증권 연구원은 "4분기에도 강달러가 이어질 것"이라며 "환율이 더 오를지는 회의적"이라고 평가했다.
원·달러 환율은 통상 한국 실물경제와 비슷한 흐름을 보인다.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이 좋아지면서 한국 자산을 사들이기 위한 원화 환전 수요가 늘어나는 등의 영향 때문이다.
하지만 환율이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19 위기 수준인 1200원에 근접한 것과 달리 한국의 실물경제는 안정 궤도에 진입했다. ‘수출주도 경제’인 한국의 핵심 펀더멘털 지표로 꼽히는 경상수지는 지난 8월(75억달러 흑자)까지 16개월 연속 흑자행진을 이어갔다. 이달 1~10일 수출액은 작년 동기 대비 63.5% 증가한 152억달러를 기록하는 등 최근 수출지표도 견조했다. '외환 방파제'로 통하는 외환보유액은 지난 9월 말에 4639억7000만달러로 지난 7월 말부터 석달 연속 사상 최대치를 갈아치웠다.
기초체력이 탄탄한 것과 달리 원·달러 환율이 치솟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가 꼽힌다. 우선 Fed가 돈줄을 죌 것이란 기대간 반영된 것이다. 서부텍사스산원유(WTI)가 배럴당 80달러를 웃도는 등 인플레이션 우려는 커진 데다 미국 고용 지표는 개선되고 있다. 12일(현지시간) 발표된 미국의 8월 채용공고는 1043만 건으로 전달 기록한 역대 최대치인 1109만 건에 이어 역대 두번째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Fed가 테이퍼링에 나서면 시중에 쏟아내는 유동성이 줄고 그만큼 달러가치는 뜀박질하게 된다.
부동산개발기업 중국 헝다그룹 파산 위기가 깊어진 데다 최악의 전력난을 겪는 중국의 올해 성장률이 하락할 것이라는 평가도 환율을 밀어올리는 변수로 작용 중이다.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은 전력난 등을 반영해 중국의 성장률을 줄줄이 하향조정했다. 골드만삭스가 8.2%에서 7.8%, 노무라증권은 8.2%에서 7.7%로 각각 내렸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수출시장인 만큼 두 나라 경제의 상관관계가 깊고 환율도 비슷하게 움직인다. 중국 실물경제가 출렁이는 만큼 원화가치도 흔들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기에 기업들도 수출로 들어오는 달러를 시장에 풀지 않고 금고에 쌓아두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8월 기업의 달러예금은 631억9000만달러로 전달보다 9억4000만달러 늘었다.
기업들의 원화 현금창출력이 좋은 만큼 달러를 원화로 환전하려는 자금 수요도 줄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기에 서울 외환시장에서 핵심 달러 공급처 역할을 했던 조선업체의 달러 공급이 줄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선박 수주가 늘어나면서 올해 목표치를 상반기~3분기에 조기 달성하자 조선업체들이 수주 물량을 조절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