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텍사스원유(WTI) 가격이 7년 만에 종가 기준으로 배럴당 80달러를 돌파했다. 천연가스와 석탄 가격이 상승하면서 대체재인 원유 수요가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이 유가 억제를 위한 압박에 나설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11일(현지시간) WTI 선물(11월물)은 전 거래일보다 1.5% 오른 배럴당 80.52달러로 마감했다. WTI 선물이 종가 기준으로 배럴당 80달러를 넘긴 것은 2014년 이후 7년 만이다. 지난해 10월 말 대비 125% 상승했다. 같은 날 브렌트유 선물(12월물)도 83.65달러로 마감하며 3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다.
최근 상승세를 타고 있는 원자재 중에서도 유가 상승률은 돋보인다. WTI 시세는 올 들어 66% 올랐다. 올해 110.5% 급등한 천연가스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상승률이다. 원유를 비롯한 원자재 시세를 반영해 산출하는 블룸버그상품지수(BCOM)는 올 들어 31.6% 올랐다. 중국 등의 전력난으로 생산에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는 예상에 알루미늄 시세는 같은 날 1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투자자들 사이에서 원유가 가장 큰 인기를 끄는 이유로는 공급과 수요의 불일치가 꼽힌다. 컨설팅업체 우드맥킨지는 경제 재개와 이동 증가로 전세계의 4분기 원유 수요가 전 분기(하루 9700만배럴)보다 늘어난 하루 9900만배럴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이런 상황에서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을 비롯한 산유국들의 연합체인 OPEC+는 이달 초 추가 증산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투자자들의 압박으로 서구 정유회사들은 증설 투자를 쉽사리 결정할 수 없는 처지다. 반면 천연가스와 석탄 가격은 급등하고 셰일가스 증산 속도는 빠르지 않아 원유로의 수요 쏠림이 강해지고 있다. 연말 국제유가 전망치로 미 은행 씨티그룹은 배럴당 85~90달러, 뱅크오브아메리카는 100달러를 제시했다. 이날 한때 WTI 11월물과 12월물의 가격차(타임스프레드)가 2019년 이후 2년 만에 최대폭으로 확대되는 등 유가 상승에 ‘베팅’하는 투자금도 급증했다.
하지만 미국이 국제유가 상승세를 마냥 방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최근 미국 인플레이션의 가장 큰 원인이 에너지 가격 상승이기 때문이다. 미 정부는 지난 8월에도 OPEC에 증산을 촉구한 전례가 있다. 단 별 소득은 거두지 못했다. 대니얼 예긴 IHS마킷 부회장은 이날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곧 산유국들을 압박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웨인 고든 UBS자산운용 전략가는 “국제유가가 배럴당 90달러에 이른다면 산유국들이 증산으로 생각을 바꿀 여지가 있다”고 내다봤다. 최근 이라크 정부는 수요가 뒷받침된다면 증산할 의사가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