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현실이 된 '미래 의학'

입력 2021-10-11 17:36
수정 2021-10-12 00:02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와중에 인류의 가장 큰 고민은 뭘까? 직업이 의사인지라 한평생 싸워온 ‘암(癌)’이 먼저 떠오른다. 암 환자는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10년 뒤면 우리나라 국민 4명 중 한 명은 암 진단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행인 것은 치료 성적이 좋아지면서 암 생존율도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암도 저마다 성질이 다르다. 같은 암이라도 사람마다 성질이 다르다. 개인 맞춤 치료, 정밀의료 같은 미래 의학의 패러다임 전환은 이런 ‘다름’에서 시작한다.

10년 전 작고한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췌장암이 재발했을 때 10만달러를 들여 자신의 췌장암 세포의 유전체 정보를 분석했다. 그는 유전체 분석을 통해 암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정밀의료 개념이다.

유명한 할리우드 여배우 앤젤리나 졸리의 이야기도 생각난다. 어머니와 이모를 유방암으로 잃은 그는 유전자 분석을 통해 자신도 BRCA1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 유방암 확률이 50%가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 예방적 유방절제술을 받았다. 당시 과감한 그의 행보에 의료계에서도 논란이 일었다.

최근 말기 폐암을 약물치료로 완치한 경우도 있다. 특정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있는 비소세포성 폐암은 표적치료제로 치료할 수 있다. 유전자가위 기술은 희귀유전성 질환 치료에 활용되고 있다. 이런 성과는 오랜 연구와 기술 개발의 결과다.

1988년 미국 의회는 30억달러를 투자해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한국도 2017년 차세대 염기서열 분석법을 건강보험으로 편입해 많은 병원이 희귀유전성 질환 진단과 치료 체계를 수립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혜택은 환자들에게 돌아갔다.

지금 우리는 10만달러의 1%도 안 되는 비용으로 잡스가 한 유전체 분석(차세대 염기분석)을 의뢰할 수 있다. 질병의 정확한 진단뿐 아니라 예방 치료가 가능하다. 암은 치료 방향 및 방법 선택이 중요하기에 개인별 암세포의 유전적 특성을 분석해 최적의 치료법을 제시한다. 이처럼 미래 의료는 유전자의 기능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더 개별화, 예측화, 고급화할 것이다. 필자가 일하고 있는 연세의료원을 비롯한 국내외 많은 의료기관이 ‘정밀의료’ 분야에 집중하고 있는 이유다.

물론 유전체 분석이 모든 암을 정복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환자는 자신의 암에 대한 유전적 성질을 알고 관련 전문의의 인간적 관심과 의학적 배려만으로도 이미 정밀 암치료의 수혜자가 될 것이다.

유전자를 분석해 진단하는 전쟁 같은 의료 현장에서 인간 개개인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커지는 지금이 미래 의료의 시작이 아닐까? 첨단 유전체 분석과 인술의 융합이 진정한 미래 의학의 패러다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