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 장기화 경고에…신흥국 '식탁물가 비명'

입력 2021-10-08 17:18
수정 2021-10-09 01:05
영국과 유럽 중앙은행이 일제히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에서 벗어나면서 시작된 물가 상승세가 예상보다 오래갈 것이란 전망을 내놨다. ‘일시적 물가 상승’이라던 기존 입장에서 한 발 물러선 것이다. 소비 수요가 급증하고 공급망이 무너지며 촉발된 세계적 물가 상승은 에너지난 등 연쇄 파장을 불러오고 있다. 이를 해결해야 하는 각국 중앙은행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중앙은행 “인플레, 예상보다 길 것”
휴 필 영국 중앙은행(BOE) 신임 수석이코노미스트는 7일(현지시간) “영국의 높은 물가상승률이 예상보다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날 재무위원회 질의에 대한 답변서를 통해 “일시적 물가 상승의 규모와 기간이 예상보다 크다는 게 증명되고 있다”고 밝혔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필이 금리 조기 인상에 찬성표를 던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고 전했다. 이달 기준 영국의 정책금리는 연 0.1%다. 현지에선 BOE가 오는 12월 회의에서 금리 인상을 결정해 내년 말 연 0.75%까지 금리를 올릴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런 속도가 좀 더 빨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유럽중앙은행(ECB) 집행위원회 위원인 이사벨 슈나벨도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 그는 “내년에 가격 변동이 완전히 가라앉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인플레이션 압력을 높일 만한 불확실성 요인이 여러 가지 남았다”고 했다. 지난달 ECB 회의록에 실린 슈나벨의 발언은 이날 회의록과 함께 공개됐다. 해당 회의에서 ECB는 올해 유럽의 물가상승률을 2.2%로 추정했다. 내년 1.7%, 2023년 1.5%까지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일부 위원은 이런 전망치가 지나치게 낮다고 지적했다. 공급망 병목 현상이 예상보다 길게 가고 극심한 인력난에 임금까지 인상되면 물가가 더 가파르게 오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中 에너지난에 인도 철강까지 영향물가 상승세가 장기화할 수 있다는 전망에 힘을 보태는 또 다른 요인은 중국의 에너지난이다. 최대 수출국인 중국은 극심한 전력난에 허덕이고 있다. ‘세계의 공장’인 중국이 멈추자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 공포까지 번졌다.

중국 전력난 여파로 모든 산업 영역에서 공급 부족 문제가 가중될 수 있다고 블룸버그통신은 내다봤다. 네덜란드 라보은행에 따르면 올 9~10월 종이 공급은 10~15%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에서 생산이 중단되면서다. ASE 테크놀로지 등 반도체 패키징 공장도 가동을 일시적으로 멈췄다. 중국 톈진과 광저우에 있는 완성차 업체 도요타 공장도 마찬가지다.

중국이 석탄 사재기에 나서면서 인도 제철소들이 지급하는 석탄 비용은 예년의 네 배로 급증했다. 인도 철강기업 JSW에너지는 철강 가격도 인상해야 할 것으로 내다봤다. 피해 큰 신흥국들, 대응 촉각신흥국과 개발도상국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식품 물가가 급등하면서 엥겔지수(전체 지출에서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율)가 높은 중진국과 저개발국 장바구니 물가에 비상이 걸렸다.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 간 경제 격차가 더 벌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선진국 물가상승률은 올해 말 3.6%에 도달한 뒤 내년 중순 2%까지 완만하게 내려갈 것으로 예상된다. 신흥국과 개발도상국 물가상승률 예측치는 올해 말 기준 6.8%다. 선진국보다 가파른 상승세다.

선진국의 긴축 재정 여파가 신흥국에 경제 충격으로 번질 위험도 크다. 2013년 미국 중앙은행(Fed)이 양적 완화 프로그램을 축소하자 신흥시장을 지탱하던 자본이 일제히 빠져나갔다. 신흥국 화폐 가치가 떨어졌고 물가는 올랐다. IMF는 부자 나라들의 재정 적자가 만성적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요인이라고 진단했다.

긴박한 상황이지만 각국 중앙은행이 경제 회복을 위해 쓸 수 있는 카드가 거의 남지 않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코로나19 확산 후 경기부양책을 가동하면서 이미 시장에 유동성을 충분히 공급했기 때문이다. 백신 공급 격차가 큰 데다 저개발국 등에서 수백만 명을 먹여 살린 세계화가 코로나19 유행으로 후퇴된 것도 경제 격차를 키우는 요인이 될 것으로 FT는 내다봤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