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주(電柱)’. 흔히 전봇대라 불리는 전주는 수십 년간 어두운 밤거리를 환히 밝혀줬습니다. 그런데 이 전주가 디지털 시대에 맞춰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운전자의 충돌 사고를 예방하는 ‘눈’이 된 것입니다.
일본 전력 업체 간사이 전력은 일본 전역에 설치한 270만 개의 전주를 하나의 디지털 인프라로 변신시켰습니다. 바로 전주를 활용해 길거리의 보행자 정보를 시내버스에 전달해 사고를 방지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인데요. 전주에 자동차와 보행자를 감지하는 센서를 설치해 버스가 교차로에 있는 다른 차량, 자전거, 보행자 등을 인식해 주는 시스템입니다. 버스 운전자에게 이들의 위치와 속도, 방향 등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전송해 사고를 예방하는 구조입니다.
실제로 센서가 접목된 전주는 사고를 유의미하게 줄일 수 있다는 게 회사 측의 설명입니다. 간사이 전력의 자회사인 간사이 송배전과 교세라 그룹 등 6개 업체는 지난 3월 오사카시에 있는 전주에 센서를 장착한 ‘사고 방지 시스템’에 대한 실증을 진행했는데요. 실증 결과에 따르면 전주는 버스 운전자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있는 차량 등을 감지해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순간을 포착하고, 버스 운전자가 착용한 골전도 이어폰을 통해 ‘위험’ 안내 신호를 전달했습니다.
간사이 전력은 이러한 사고 예방 시스템이 향후 도래할 자율주행차량 시대에서도 접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간사이 전력은 파나소닉, 도요타 등과 전주를 자율주행차량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방안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전주가 도시 곳곳에 위치해 있고, 전선과 통신선, 인터넷 연결선 등이 탑재돼있는 만큼 충분히 자율주행차의 사고를 방지할 수 있는 ‘눈’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게 회사의 설명입니다. 회사 측은 “어두운 길거리를 밝혀주던 전주가 미래사회에선 디지털 인프라로서의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전주의 디지털화는 지난해 간사이 전력에서 분사해 송배전 사업을 맡은 간사이 송배전의 새로운 시도입니다. 간사이 송배전의 주요 수입은 송전망 임대료지만, 지난해를 시작으로 에너지 절약 등의 전력 수요 감소 등으로 수익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추세가 이어진다면 회사의 영업이익은 지난해 6484억원(608억엔)에서 오는 2025년엔 5330억원(500억엔) 수준으로 감소할 것으로 일본 매체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내다봤습니다. 간사이 송배전으로선 새로운 이익 창출 분야가 절실해진 상황이 된 것이죠.
유지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점도 전주의 디지털화를 추진하게 된 배경입니다. 20세기 후반 일본의 경제 고도 성장기에 대량으로 설치된 콘크리트 소재인 전주는 시간이 흘러 노후화가 진행됐고, 현재는 재건축이 필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콘크리트 전주의 수명은 60년~70년 정도로, 총 재건축 비용은 매년 수천억원 대로 알려졌는데요, 다만 동일한 시기에 설치된 전주도 수명은 제각각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바닷가에 가깝게 위치한 전주는 내륙에 설치된 전주보다 노쇠화가 빨리 진행됩니다. 간사이 송배전은 이 점에서 착안해, 전주를 디지털화함으로써 효율적으로 관리할 방안을 찾아냈습니다.
간사이 송배전은 전주의 열화 및 노화 여부, 전주 간의 거리 등 설비적 요소와 지역별 강수별 현황, 바다와 떨어진 거리 등 환경적 요소 등 40가지 종류의 데이터를 인공지능(AI)으로 분석해 재건축이 필요한 사례를 골라내는 예측 모델을 구축했습니다. 이로써 정부 차원에서 진행하는 5년 주기의 전주 점검 결과보다 훨씬 정교하게 전주의 노후화 여부를 살펴 재건축 비용을 유의미하게 줄이고, 수명 주기도 늘릴 방안을 찾아낼 수 있게 됐습니다. 회사 측은 “개별적인 전주마다 언제, 어떤 요인으로 노쇠화가 진행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며 “전주 중엔 130년 이상 사용이 가능한 전주도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탈탄소에 대한 중요성이 전 세계에서 부각받는 가운데 전력의 안정 공급에 대한 수요는 점차 확대되고 있다”며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면서 성장하려면 보유하고 있는 자산의 효율적인 활용과 유지의 모두가 중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활용 분야가 한정돼 있던 전주의 디지털 전환을 보여준 간사이 송배전의 시도는 우리 사회에 다양한 시사점을 보여준다”고 덧붙였습니다.
배성수 IT과학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