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퇴직연금으로 랩어카운트에 가입한 것은 법령 위반이라 판단하고 가입 계약을 모두 해지하라고 증권사에 통보했다. 투자할 시간이 모자라거나 금융지식이 부족해 증권사에 운용을 맡겼던 가입자들 사이에선 “정부가 노후자금 불리는 것까지 막는다”는 불만이 터져나온다. 해석 뒤집은 고용노동부
6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미래에셋증권은 최근 퇴직연금으로 랩어카운트에 가입한 고객 2만2000명에게 “내년 6월 말까지 상품을 해지해 달라”는 내용의 이메일과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퇴직연금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가 지난달 랩어카운트를 통해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것은 법령 위반이란 해석을 내렸기 때문이다.
랩어카운트는 금융사가 고객이 맡긴 돈을 알아서 굴려주는 상품이다. 전문가들이 시장 상황에 맞게 주식 채권 등에 자산을 배분해준다. 이 때문에 투자에 자신이 없거나 시간이 부족한 직장인에게 인기를 끌었다.
현재 퇴직연금 랩어카운트 상품을 판매하는 금융사는 미래에셋증권이 유일하다. 잔액은 지난달 말 기준 1조3000억원에 이른다. 고용부는 내년 6월 말까지 가입자가 남아 있을 경우 미래에셋증권에 시정명령 등의 행정적 조치를 내릴 수 있다고 밝혔다.
미래에셋증권은 2009년부터 퇴직연금 랩어카운트를 판매해왔다. 이 증권사는 이 상품 판매를 준비 중이던 2008년 고용부에 ‘퇴직연금으로 랩어카운트에 가입하는 게 가능하냐’고 질의했고, 당시 고용부는 ‘가능하다’고 답변했다.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에는 퇴직연금으로 가입하는 상품은 보험계약이나 신탁계약을 통해야 한다고 돼 있다. 신탁계약에는 가입자가 운용방법을 직접 지정하는 특정금전신탁과 운용방법을 지정하지 않는 불특정금전신탁이 있다.
고용부는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시행령을 통해 퇴직급여 신탁계약의 범위를 특정금전신탁으로 한정했다. 고용부는 이 시행령을 근거로 랩어카운트가 불특정금전신탁에 해당한다고 해석한 뒤 이번에 판매 금지를 통보한 것이다.
국회에는 퇴직연금으로 랩어카운트 등 투자일임형 상품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한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윤창현 국민의힘 의원 대표발의)이 계류 중이다. 일방 통보에 가입자 ‘분통’랩어카운트를 통해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사람들은 내년 6월 말까지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2018년 3월부터 퇴직연금을 랩어카운트로 운용하고 있는 30대 직장인 심모씨는 “지금까지 20% 가까운 누적 수익률을 올렸고 연평균 수익률도 5%가 넘는다”며 “일이 바빠 퇴직연금 운용에 신경을 쓸 틈이 없는데 랩어카운트를 해지하면 이 같은 수익률을 내기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미래에셋증권 퇴직연금 랩어카운트의 지난달 말 기준 1년 수익률은 8.87%(주식 비중 40% 가입자 기준)다. 2009년 상품 판매 이후 연평균 5.88%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지난해 국내 퇴직연금 평균 수익률이 연 2.58%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뛰어난 성적이다.
국회에서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도입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와중에 고용부가 랩어카운트 판매를 금지시킨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도 있다. 디폴트옵션은 퇴직연금 가입자가 적립금에 대해 운용 지시를 따로 하지 않아도 금융사가 대신 연금을 운용해주는 제도다. 가입자가 어떤 금융상품을 살지 지정하지 않아도 금융사가 알아서 퇴직연금을 운용한다는 점에서 랩어카운트와 비슷하다.
고용부 관계자는 “과거 법령 해석이 부적절한 측면이 있어서 이번에 퇴직연금 랩어카운트를 허용하지 않게 됐다”며 “가입자들이 다른 금융상품으로 변경할 수 있게 충분한 유예기간을 뒀다”고 말했다.
이태훈 기자 bej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