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국제 유가는 배럴당 20달러까지 폭락했다. 코로나19 확산 탓에 세계 공장들이 가동을 멈춘 데다 러시아와의 ‘석유 전쟁’을 선포한 사우디아라비아가 원유 공급 확대 계획을 발표하면서다.
수요가 급감하고 공급이 넘치던 ‘풍요의 시대’는 1년 반 만에 끝났다. 세계 경제가 팬데믹 위기에서 벗어나자 원유 천연가스 화석연료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 공급을 늘려 가격을 잡아야 하지만 산유국들엔 1년 전 유가 폭락이 트라우마로 남았다. 각국이 친환경 에너지 전환에 힘을 쏟느라 화석연료 투자를 줄인 것도 유가 상승을 부채질하고 있다. 공급 속도 조절 나선 산유국들5일 뉴욕상업거래소에 따르면 서부텍사스원유(WTI)는 1년 만에 가격이 1.96배로 급등했다. 천연가스 가격은 같은 기간 2.2배로 뛰었다. 코로나19 위기에서 회복하면서 에너지 수요가 급증했지만 세계 산유국들은 원유 생산을 급격히 늘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비(非)OPEC 산유국 협의체인 OPEC+는 다음달까지 기존 원유 공급 계획을 유지하기로 했다. 이들 국가를 소극적으로 만든 것은 코로나19 트라우마다. 감염병이 재확산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여전히 남아 있다.
지난해 초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세계 원유 수요는 급감했다. 산유국들은 가격을 조정하기 위해 생산량을 줄이려고 논의했지만 사우디와 러시아의 반대로 합의에 실패했다. 작년 3월 불거진 석유전쟁이다. 국제 유가는 곤두박질해 2000년대 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미국에선 지난해 4월 한때 석유값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기름 탱크가 가득 찼지만 수요가 적어 생산업체가 돈을 주고 기름을 빼야 했다는 의미다. 석유수입회사 레티고석유의 커크 에드워드 대표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15~16개월 전만 해도 마이너스 유가를 기록했기 때문에 기업들이 생산을 늘리는 데 쉽게 나서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화석연료 투자 급감탄소중립 정책 여파가 에너지 가격 인상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수년간 에너지 시장에 피로도가 누적됐지만 지난해 코로나19로 수요가 줄어 이런 문제가 감춰졌다. 하지만 올해 생산이 늘고 수요가 급증하자 위기가 한꺼번에 드러났다.
친환경 에너지 생산을 확대하기 위해 태양광 풍력 등에 투자를 집중했지만 아직 만족할 만한 전력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이 기간 화석연료 분야 투자는 급감했다.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원유 매장량이 고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석유 기업들은 매년 자본의 80%를 재투자해야 한다. 하지만 석유산업 설비투자 비용은 2014년 7500억달러에서 올해 3500억달러로 급감했다. 같은 기간 비축된 원유 생산량은 50년치에서 25년치로 줄었다.
친환경 기업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자 투자자들은 석유나 가스 기업 투자를 줄이고 있다. 이런 투자 성향은 산업 성장에도 악영향을 주고 있다. 석유 기업들은 새 유전을 찾을 때까지 주식을 팔거나 빚을 내 자금을 끌어모아야 한다. 기업들은 대규모 생산시설 확대 등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있다.
친환경 에너지는 화석연료에 비해 값이 비싸다. 에너지 전환 속도가 지나치게 빠른 것도 가격 인상을 부추긴다는 지적이다. 에너지 사모펀드 킴퍼리지의 벤델 이사는 “석유와 천연가스 공급이 제한됐지만 해가 들지 않고 바람이 불지 않을 때를 위한 배터리 저장 비용은 계속 필요하다”며 “앞으로 10년은 에너지 가격이 상승하는 시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에너지 해외 의존도도 변동성 키워유럽과 미국이 탄소중립 정책에 속도를 내면서 화석연료 생산이 특정 국가에 편중되고 있는 것도 가격 변동성을 높이는 요인이다. 유럽은 천연가스 공급량의 40%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올해 러시아가 공급을 줄이자 유럽에서 천연가스 가격이 급등했다.
중국 공장을 멈춰 세운 석탄 대란은 호주산 석탄 수입이 막히면서 시작됐다. 중국은 세계 1위 석탄 수입국이다. 여파는 인도로 번졌다. 석탄 화력 발전이 전체 에너지 공급의 66%를 차지하는 인도는 인도네시아산 석탄에 의존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산 석탄 가격은 6개월 만에 3배 넘게 뛰었다.
겨울을 앞두고 시작된 에너지 가격 상승 랠리는 당분간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내년 미국 기업들의 에너지 투자는 2019년보다 9%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겨울 한파가 심하면 내년 초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