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준조세 금지법을 제정하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인 2017년 1월 한 포럼에서 “기업을 권력의 횡포에서 벗어나도록 하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문 대통령은 “대기업이 2015년 한 해에 납부한 준조세만 16조4000억원(법정 부담금 15조원, 비자발적 기부금 1조4000억원)에 이른다”며 없애려는 준조세의 구체적인 규모까지 밝혔다.
문 대통령이 약속한 ‘대기업 준조세 금지법’은 집권 4년 반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오히려 준조세 규모는 더욱 커지고 있다. 법정 부담금은 지난해 90개 분야에서 총 20조1847억원이 걷혔다. 감사원은 지난 8월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의 부담금 징수·부과 실태를 감사한 결과 “코로나 상황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부담금 납부에 대해 기업이 체감하는 부담이 종전보다 커졌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공식 통계가 없는 비자발적 기부금 역시 조(兆) 단위로 걷혔을 것이라는 게 경제계의 추산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권은 기업들을 상대로 각종 기부금 납부를 압박하고 있다.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이 대표적이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는 올해 국정감사에서 주요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을 불러 농어촌상생협력기금 추가 출연을 요구하기로 했다.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 권영수 LG 대표이사 부회장 등이 증인 명단에 오르내리고 있다. 농해수위 소속 이개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농어촌상생협력기금 모금의 강제성을 부여하는 방안을 신중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은 2015년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국회 비준 당시 농민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도입됐다. 기업으로부터 매년 ‘자발적으로’ 1000억원씩 기부받아 농어촌 지원에 쓴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매년 모금액이 목표액의 20~30%에 그치자 농어촌에 지역구를 둔 여야 의원들이 국감 때만 되면 기업을 압박하고 있다.
민주당은 ‘코로나 불평등’ 해소를 목적으로 사회연대기금 도입도 추진하고 있다.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걷은 기금을 저소득층 생계 지원, 저신용자 신용 회복 등에 쓰자는 것이다. 경제계는 결국 농어촌상생협력기금과 같은 기업 ‘팔 비틀기’가 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준조세 금지법 도입은 고사하고 오히려 ‘강제 모금’ ‘기금 신설’ 등을 논의하고 있는 게 정치권의 현 상황이다. 20대 대선을 5개월 앞둔 시점이지만 준조세 금지법을 ‘립 서비스’하는 여야 대선 후보들도 눈에 띄지 않는다. 준조세 감사를 받아야 할 대상은 정부 부처와 지자체가 아니라 정치권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