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완장'과 '거덜'

입력 2021-10-04 17:16
수정 2021-10-05 00:47
“자네도 한번 맛을 들인 담부터는 완장이란 것이 어떤 물건인지 알게 될 것이네. 완장이 없으면은 어떤 놈이 권력 있는 놈이고 어떤 놈이 권력 없는 놈인지 사람들이 알아먹을 수가 있어야지.”

윤흥길 장편소설 《완장》의 주인공 임종술이 한 말이다. 그는 대처를 떠돌다 감옥까지 갔다 온 백수건달이다. 어느 날 부동산 졸부 최 사장의 저수지 감시원이 되면서 그의 눈빛이 달라진다. 그냥 ‘감시’라는 완장보다 더 강렬한 완장을 원한 그는 ‘감독’이라고 새긴 글씨 좌우에 빨간 가로줄 세 개까지 그려넣은 완장을 따로 맞춘다.

깜냥 안 되는 사람이 완장을 차면 눈에 뵈는 게 없다. 악역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는 권력자의 숨은 의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완장’에 취하면 역풍을 맞게 마련이다. 종술은 최 사장의 낚시까지 금지하는 ‘만행’ 끝에 파면된다. 그런 뒤에도 권력 맛을 못 잊어 가뭄에 저수지 수문 여는 것마저 막고 나선다.

소설 중간에 ‘완장을 차고 마냥 거들먹거리는 꼴은 산전수전 다 겪은 고참 작부가 보기엔 겨드랑이를 간질이는 수작에 지나지 않았다’는 구절이 나온다. ‘거들먹거리다’는 남의 권세를 빌려 거만하게 구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은 조선시대 말을 관리하던 사복시(司僕寺)의 하인을 일컫는 ‘거덜’에서 나왔다.

거덜의 역할은 윗사람이 행차할 때 “물렀거라” 하며 앞길을 틔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뒷배를 믿고 ‘거드름’을 피우며 백성들에게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여기에서 고관들의 말(馬)을 피(避)해 뒷골목으로 다니는 ‘피맛길’ ‘피맛골’이 생겼고, 거덜의 횡포 탓에 ‘거덜 나다’라는 말도 나왔다.

이런 사람들이 권세와 이권을 휘두르면 나라가 거덜 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한자리 차지하는 ‘낙하산 완장’과 선거 캠프, 전관 출신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거꾸로 공정과 정의를 외친다. 윤흥길은 “꾀죄죄한 가짜 권력의 떠세하는 행태를 그려 보임으로써 진짜배기 거대권력의 무자비한 속성을 끄집어 들어내고자 했다”고 서문에 썼다.

수많은 ‘완장과 거덜’ 뒤에는 큰 그림을 ‘설계’한 몸통이 따로 있다. 소설의 몸통도 부동산으로 떼돈을 번 최 사장이다. 종술과 눈이 맞은 작부 김부월조차 이를 알아채고 한마디 했다. “눈에 뵈는 완장은 기중 벨볼일없는 하빠리들이나 차는 게여! (…) 진수성찬은 말짱 다 뒷전에 숨어서 눈에 뵈지도 않는 완장들 차지란 말여!”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