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DL보다 크레이튼 사정을 속속들이 잘 아는 곳이 있을까요. 결단만 내리면 거래는 속전속결일 상황이었죠.”(투자은행 업계 관계자)
크레이튼이 인수합병(M&A)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이 알려진 건 올해 초 무렵이다. 국내 연관 석유화학사들도 발 빠르게 인수 가능성 검토에 나섰다. 하지만 한 발 빠른 곳은 DL그룹이었다. 이미 인수 조건에 대한 검토를 마친 뒤 최종 결론을 앞두고 내부 격론이 오가던 상황이었다. DL케미칼의 목표인 ‘글로벌 20위권 화학사 진입’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는 데 구성원 대다수가 동의했지만 문제는 ‘가격’이었다. "크레이튼에 돈 냄새가 난다"크레이튼의 전격적인 매각 배경엔 끝없이 떨어지는 ‘주가’가 있었다. 2018년 주당 51달러까지 치솟았던 회사의 주가는 이후 줄곧 하락했고 미국이 코로나19 여파에 휩싸인 지난해 초엔 10달러 미만까지 떨어졌다. 2008년부터 회사를 이끌어온 크레이튼 최고경영자인 케빈 포가티는 계속된 주가 하락으로 주주들은 물론 대형 펀드들의 공세에 시달렸다.
코로나19 초반 미국 대부분 상장사가 주가 하락을 겪은 점을 고려해도 크레이튼엔 고질적 문제가 있었다. 무엇보다 대형 M&A로 인한 후유증이 컸다. 포가티를 포함한 경영진은 2016년 13억7000만달러(약 1조7000억원)를 들여 애리조나케미컬 인수를 단행해 사업 다각화를 꾀했다. 애리조나케미컬은 송진 기반 화합물 등 친환경 바이오케미컬 분야에서 독보적인 회사였다. 하지만 두 회사 간 시너지가 좀처럼 발현되지 않으면서 기나긴 부진에 빠졌다.
결국 크레이튼은 혹독한 자산 재평가에 돌입했다. 2019년엔 브라질 자회사를 매물로 내놨다. DL그룹도 인수전에 뛰어들어 막바지까지 경합했지만 쓴맛을 봤던 딜이다. DL그룹은 이 직후인 지난해 크레이튼이 카리플렉스(합성수지고무) 사업부를 연이어 매각하자 재도전해 승기를 잡았다. 크레이튼이 연이어 사업을 매각하자 ‘돈 냄새’를 맡은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은 경영진이 회사 전체 경영권을 내놓는 데 베팅했다. IB 임원들은 분주히 서류 가방을 들고 크레이튼 본사가 있는 미국 휴스턴을 오갔다. 고가 인수 부담에도…시너지에 '베팅'DL그룹이 인수한 카리플렉스 사업부는 크레이튼 내에선 ‘미운오리’였지만, 매각 후 ‘백조’가 됐다. 카리플렉스 사업부의 주력은 수술용 장갑 등 특수분야 제품이다. DL그룹 인수 직후 코로나19 여파로 수요가 폭증했다. 크레이튼 주가도 코로나 회복기에 빠른 속도로 반등에 성공했지만, 직접적인 수혜를 누리는 카리플렉스는 이미 DL그룹에 넘어온 상황이었다. DL그룹 내부에선 “알짜를 뺀 나머지 사업을 높아진 주가로 살 이유가 없다”는 반론이 만만치 않았다.
김상우 DL케미칼 부회장은 장고에 빠졌다. 김 부회장은 카리플렉스 사업부 인수를 진두지휘한 그룹 내 M&A 키맨이다. DL그룹 합류 이전 BNP파리바, 소프트뱅크코리아 등 금융계를 거치며 M&A 실무를 직접 챙겨온 전문가다. 이미 사업부 인수 과정에서 밤샘 작업을 이끌어온 그는 크레이튼 내 다른 사업부의 현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장고에 빠졌던 DL그룹은 인수를 진행하기로 결단했다. 카리플렉스에 공격적 증설을 계획한 상황에서, 원재료를 공급하는 크레이튼에 종속되기보다 회사를 인수해 수직계열화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이란 판단이 섰다. 가격 부담보다 인수 직후 곧바로 글로벌 화학사 중 한 곳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는 시너지에 방점을 뒀다. 포가티를 포함한 경영진과 이사진도 만장일치로 DL그룹으로의 경영권 매각에 찬성했다.
깜짝 빅딜은 크레이튼의 발표로 세간에 알려지게 됐다. DL그룹 사상 최대 규모 M&A로 부채 등을 포함하면 3조원에 육박한 ‘메가 딜’이었다. 2018년 KCC컨소시엄의 모멘티브 인수에 이어 국내 기업이 또 한 번 글로벌 톱티어 화학사를 인수한 사례로 자리잡았다. IB업계 관계자는 “앞으로 한국 기업들도 탐나는 글로벌 기업이 있으면 주가와 CEO 거취를 항상 체크해 공략해야 한다는 교훈을 줬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