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후미오 차기 일본 총리(사진)가 금융소득 비중이 높은 부유층일 수록 세금부담이 오히려 낮아지는 '1억엔의 벽'을 무너뜨리겠다고 선언해 일본증시가 초긴장 상태에 빠졌다.
기시다 신임 자민당 총재는 30일 정책집을 통해 "금융소득과세를 개선해 '1억엔의 벽'을 타파하겠다"고 밝혔다. 중산층에 대한 분배를 늘려 경제격차를 줄이는 것을 핵심 경제정책으로 내세운데 따른 일종의 후속조치다.
1억엔의 벽이란 세금부담이 소득 1억엔(약 10억6426만원)까지는 점점 높아지다가 1억엔을 넘으면 오히려 줄어드는 현상을 말한다. 누진세 방식이어서 연봉이 높을 수록 세율이 최대 45%까지 오르는 급여소득세와 달리 주식의 매각차익이나 배당에 붙는 금융소득의 세율은 일률적으로 20%(소득세15%+주민세 5%)이기 때문에 나타난다.
일본 재무성 자료에 따르면 소득이 5000만~1억엔 이하인 사람의 세금부담률은 27.9%인데 50억엔 초과 100억엔 이하의 부담률은 16.1%로 10%포인트 이상 낮았다. 소득이 100만엔~1500만엔 이하인 사람의 평균 세율(15.5%)과 비슷하다.
기시다 총리가 금융소득세율을 높여 부유층에 세금을 더 많이 걷으면 소득격차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급여소득과 금융소득의 세 부담 차가 불공평하다는 점은 집권여당인 자민당도 인식하고 있다. 올해 자민당의 세제개선 방안에는 "금융소득과세의 개선을 종합적으로 검토한다"고 명시돼 있다. 올 연말 논의되는 2022년도 세제개정에서도 금융소득과세 인상은 주요 쟁점이 될 전망이다.
일본 재무성은 제2차 아베 신조 총리 내각 시절 금융소득세 인상을 총리 관저에 제안한 적이 있다. 재무성의 제안을 가장 반대했던 인물이 당시 관방장관이었던 스가 요시히데 현 총리다.
신중론자들이 금융소득세 인상을 우려하는 이유는 주식시장에 주는 충격 때문이다. 부유층이 세 부담을 피하기 위해 일본 주식을 대량 매도하고 해외 주식 비중을 늘리면 일본 증시가 급락하고 부의 해외유출만 가속화한다는 논리다. 실제 금융소득과세 세율을 10%에서 20%로 올린 2013년 개인투자자들이 일본주식을 대량으로 매도한 전례가 있다.
일본 정부는 오랫동안 금융자산의 40~50%를 현금이나 예금으로 보유하고 있는 일본 국민들에게 주식 투자를 권장하는 '저축에서 투자로' 운동을 벌여왔다. 금융소득세율이 인상돼 개인투자자들이 주식시장에서 이탈하면 잠자는 가계 부문의 자산을 주식시장으로 돌려 금융시장을 키우려는 정부 정책에도 역행한다는 주장이다.
일본 가계 부문의 금융자산은 2000조엔에 달하지만 개인투자자들이 보유한 일본 주식은 200조엔 규모에 불과하다. 노무라증권의 가이즈 마사노부 선임 리서치 전문가는 "2000조엔의 10%인 200조엔의 현금과 예금을 일본 주식에 추가로 투자하면 개인투자자들의 수익률이 0.5%(10조엔) 늘어나 소비를 진작시킬 것"이라고 분석했다.
2000조엔에 달하는 가계 금융자산이 투자시장을 향해 움직이면 글로벌 금융회사들도 일본 시장에 주목해 스가 내각의 국제금융도시 구상이 현실화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반면 코로나19로 인해 1억엔의 벽을 허물어뜨릴 때가 왔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세계적인 대규모 금융완화의 효과로 주가는 급등했지만 부유층만 점점 윤택해지는 경제격차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어서다. 미국 등 해외에서도 금융소득과세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다만 금융소득세를 일률적으로 높이면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세금부담도 늘어나 격차가 심해진다는 지적이 많다. 이 때문에 일본 금융청 관계자는 "금융소득이 일정 금액 이상인 부유층만 증세 대상에 포함시키는 방안이 검토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