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알토스에 있는 한식당 ‘수담’엔 명물(名物)이 생겼다. 자율주행 서빙 로봇 ‘서비(Servi)’다. 식당 종업원이 로봇에 음식을 올려놓고 목적지를 찍으면 서비는 테이블을 향해 간다. 겉보기엔 둔해 보이는데 사람을 피해 요리조리 잘 다닌다. 이 로봇은 미국산(産)일까. 아니다. 음식 서빙 로봇 관련 스타트업 베어로보틱스가 만든 한국산이다. 베어로보틱스의 본사는 실리콘밸리에 있지만 로봇 생산은 100% 한국 공장에서 이뤄진다.
경기 수원에 있는 쇼핑몰 ‘앨리웨이 광교’에도 로봇이 거리를 누비고 있다. 음식배달 앱 배달의민족으로 유명한 회사 우아한형제들의 자율주행 배달 로봇 ‘딜리 드라이브’다. 배민 앱에서 로봇 배달을 신청하면 딜리는 횡단보도를 건너 인근 아파트까지 음식을 운반한다.
딜리 로봇들은 서울과 경기·강원·충청 일대 식당에서 음식 접시도 나른다. 우아한형제들이 적극적으로 딜리의 렌털 사업을 벌이고 있어서다. 모델별로 설치비 40만~80만원, 월 렌털료 80만~90만원이 드는데도 인기가 상당하다. 딜리를 도입한 식당이 300여 곳으로 늘었다.
딜리도 실리콘밸리 한식당의 서비처럼 국산 로봇일까. 광교 쇼핑몰의 딜리 드라이브는 중국 업체가 만들었다. 식당에 들어가는 딜리 플레이트 모델 5종 중 3종은 중국 회사 제품이고 2종이 한국 로봇이다.
글로벌 분업화 시대에 ‘웬 국적 타령이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로봇은 얘기가 좀 다르다. 로봇이 스스로 움직이려면 인공지능(AI)을 기반으로 한 자율주행 기술이 필요하다. 5세대(5G) 이동통신 같은 초고속 통신 인프라도 잘 갖춰져 있어야 한다. 서빙·배달 로봇이 길거리나 식당 이곳저곳을 움직이며 수집한 정보는 고스란히 기업에 ‘빅데이터’로 차곡차곡 쌓인다. 로봇이 지금의 반도체처럼 앞으로 10년, 20년 뒤 국가의 명운을 좌우할 수 있는 미래 핵심 사업으로 꼽히는 이유다.
이런 이유로 실리콘밸리 기업들도 로봇 개발에 적극적이다. 전기차 기업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개최한 ‘AI 데이’ 행사에서 휴머노이드(인간을 닮은 로봇) ‘테슬라 봇’ 시제품을 공개했다. 머스크는 “로봇이 미래 산업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빅테크(대형 정보기술업체)들은 시장 선점에 나섰다. 세계적인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이 대표적이다. 2012년 7억7500만달러에 로봇 스타트업 키바(현재 아마존로보틱스)를 인수했다. 키바 로봇은 아마존 물류센터에서 활약 중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아마존은 자율주행 배달 로봇 ‘스카우트’도 개발했다.
한국 기업들도 로봇 개발에 손을 놓고 있는 건 아니다. 경기 판교 스타트업 클러스터와 각 대학엔 로봇을 개발하는 젊은 창업자와 공학도들이 밤을 새우며 연구개발(R&D)에 한창이다. 대기업들도 바쁘게 움직인다. 삼성전자는 로봇사업화 태스크포스(TF)를 구축했고, 현대자동차는 보스턴다이내믹스 같은 로봇 스타트업을 인수했다.
국산 로봇이 없는 것도 아닌데 우아한형제들, VD컴퍼니 같은 국내 로봇 렌털 기업들은 왜 중국산을 주로 쓰고 있을까. 로봇업계에선 가장 큰 이유로 저렴한 가격을 꼽는다. 중국 정부는 로봇산업 육성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4년 “로봇산업의 기술력을 향상시켜 세계 로봇 시장을 점령하자”고 강조한 영향이다. 중국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광둥성 선전, 둥관 등에 로봇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업체들에 보조금을 퍼붓고 있다. 보조금 규모는 기업 이익의 20% 수준으로 알려졌다. 중국 푸두로보틱스, 키논로보틱스 등이 한국 제품보다 25% 이상 싼 가격에 로봇을 납품할 수 있는 이유다.
한국 정부의 서빙 로봇 육성 정책과 관련해 업계에선 ‘아쉽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만 해도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중국산 서빙 로봇에 25%의 관세를 매긴다. 한국 정부는 중국산 로봇 공습에도 팔짱만 끼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스타트업 관계자는 “정부와 정치인들이 로봇 육성을 얘기하지만 수사(修辭)에 그치고 있다”며 “서빙로봇 KC(국가통합인증)와 관련해서도 중국 제품에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갈 정도”라고 했다. 식당을 점령한 중국산 김치처럼 중국산 서빙 로봇이 전국 음식점에서 활개 치는 상황이 머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