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법’과 ‘부처 간 칸막이’. 반도체기업이 국내에서 새로운 공장을 지을 때마다 기업의 발목을 잡는 지역이기주의와 중앙부처의 규제를 일컫는 말이다. 무리한 보상 요구에 수년씩 사업이 지연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계획 수립 후 첫 삽을 뜨기까지 수년이 지체되면서 ‘골든타임’을 놓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등은 반도체 사업장 증설 기간을 단축하도록 돕는 내용을 포함한 특별법 제정을 추진 중이지만 부처 간 이견으로 지지부진한 상태다. 갈 길 먼 용인 클러스터
22일 경기 용인시와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가 주도하는 용인 반도체클러스터(조감도)의 착공 시기가 내년 3~4월로 늦춰졌다. 지난 6월에는 끝났어야 하는 지장물 조사를 최근 시작했다. 주민 협상이 순조로워도 내년 3~4월은 돼야 첫 삽을 뜰 수 있을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용인시 관계자들은 클러스터 부지인 원삼면 일대 주민을 설득하는 과정이 만만찮았다고 설명했다. 토지 보상 절차는 부지 선정→토지 및 지장물 조사→보상계획공고→감정평가→보상 협의 순으로 진행된다. 주민 대다수는 토지에 있는 건축물·수목 등 지장물의 조사를 최근까지 거부해오다 지난 13일께 조사에 응하기 시작했다. 계획은 지장물 조사가 끝난 뒤 공고를 내고, 토지와 지장물의 감정평가를 시작하는 것이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자 일단 지장물 조사 전에 공고부터 하고 토지 감정평가에 들어갔다.
지장물 조사가 끝나더라도 감정평가 결과를 토대로 토지 보상 협의를 거쳐야 하는 고비가 남아 있다. 협의 과정이 매끄럽지 못하면 사업이 더 지연될 우려가 있다. 여의치 않으면 토지를 강제 수용하는 방안도 있지만 이조차도 6개월 이상 걸린다.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가 2004년 중국 우시에 사업장을 지을 때는 부지 선정에서 완공까지 1년8개월 걸렸다”며 “지장물 조사에 들어가는 데까지만 2년7개월이 걸린 용인과 대조적”이라고 설명했다.
토지보상제도 이대로 괜찮나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국내 토지보상제도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사 방해, 협상 거부 등 시간을 끌 방법이 수두룩하다는 이유에서다. 토지보상법에 따르면 정당한 이유 없이 토지 조사를 방해하면 200만원 이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 그러나 지장물 조사에는 별도 조항이 없고, 벌금 수준도 보상금이 오르는 것과 비교하면 턱없이 낮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시간이 흐를수록 아쉬운 건 사업시행자뿐”이라고 꼬집었다.
토지 보상 과정에서 사업이 무산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SK머티리얼즈는 지난해 경북 영주시에 8500억원을 투자해 2차전지 핵심 소재인 음극재 공장을 지으려고 했지만 올초까지 토지 매입에 수차례 실패했다. 회사 측은 토지 보상에만 3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되자 협상을 포기하고 인근 상주시에 짓기로 했다. 막상 사업이 무산되자 일부 영주시의원은 상주에 공장을 짓지 말라며 반발하고 있다. 특별법 도입도 지지부진반도체와 2차전지 등 미래 먹거리 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정치권이 도입을 합의한 국가핵심전략산업 특별법 제정도 난항을 겪고 있다. 애초 9월 정기국회 통과를 목표로 했지만 부처 간 불협화음으로 세부 내용이 확정되지 않고 있다. 변재일 민주당 반도체특위 위원장은 “일부 조항을 포기할지 아니면 더 설득해볼지를 두고 고심 중”이라며 “이달에는 국회 통과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반도체산업 육성이 필요하다는 데는 공감대가 형성됐지만 각론으로 들어가자 부처들의 의견 차가 좁혀지지 않고 있다는 게 업계의 하소연이다. 대표적 조항이 수도권 대학 정원 제한 완화다. 인력 부족으로 기업들이 반도체 연구개발에 어려움을 겪는 현실을 감안해 법안 초안에 포함됐지만 일각에서는 수도권 대학에서 반도체 인력을 양성하면 지방대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반도체 신소재 개발 등에 쓰이는 화학물질 인허가 기간을 단축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 ‘반도체 화학물질 패스트트랙’도 난항을 겪고 있다. 관련 부처 공무원들이 반도체업계에만 특혜를 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변 위원장은 “추석연휴가 끝난 뒤 당과 협의해 특별법의 세부 내용 방향을 정하겠다”고 말했다.
용인=이수빈 기자 ls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