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풀어 핀테크 키운다던 금융위…이젠 "특혜받을 시기 지났다"

입력 2021-09-09 17:46
수정 2021-09-16 16:20

금융위원회는 지난 몇 년간 금융 혁신을 촉진하고 소비자 편익을 제고하는 차원에서 네이버·카카오·토스 등 빅테크(대형 IT 기업) 플랫폼의 금융 진출을 적극 유도했다. 그 결과 카카오뱅크, 케이뱅크, 토스뱅크 등 인터넷전문은행이 잇따라 탄생했고 네이버페이, 카카오페이 등 간편결제 플랫폼도 규제 완화에 힘입어 큰 폭의 성장세를 보였다.

손병두 전 금융위 부위원장(현 한국거래소 이사장)은 지난해 9월 이들 주요 빅테크 기업과 함께 ‘디지털금융협의회’를 창설하는 자리에서 “해외 거대 플랫폼의 국내 진출이 가시화하는 상황에서 국내 금융회사 보호만을 위해 디지털금융 혁신의 발목을 잡는 퇴행적인 규제 강화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며 “디지털 환경에 맞게 규제를 과감히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반년 만에 확 바뀐 금융당국
이 같은 우호적인 분위기는 올 들어서도 계속됐다. 네이버파이낸셜, 카카오페이, 비바리퍼블리카(토스 운영사), NHN페이코 등 빅테크 기업들이 모두 금융위로부터 ‘마이데이터(본인신용정보관리업)’ 본인가를 따냈으며 카카오페이는 디지털 손해보험사 허가도 받았다.

그러나 택시 대리운전 호출 앱을 운영하는 카카오모빌리티(카카오T)가 지난 8월 초 서비스 요금을 인상하면서 국민 여론이 험악해지자 금융당국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마침 정치권에서도 빅테크의 골목상권 침해에 대한 문제의식이 높아지자 당국이 행동에 나섰다. 지난 7일엔 카카오페이 토스 등 빅테크에서 제공하던 금융상품 추천 서비스를 ‘단순 광고’가 아니라 ‘중개 행위’로 규정해 오는 25일부터 현행 방식의 사업을 사실상 접을 수밖에 없도록 했다. 디지털금융협의회도 4월 7차 회의가 열린 이후 현재까지 열리지 않고 있다.

한 빅테크 업체 관계자는 “연초와 현재를 비교하면 마치 격세지감일 만큼 ‘규제의 쓰나미’가 몰아치고 있는 것 같다”며 “금융당국이 여론의 눈치를 보고 규제의 원칙과 일관성이 흔들리는 것 같다”고 섭섭함을 토로했다. “규제 예외 적용 기대하지 말라”고승범 금융위원장이 이날 빅테크 규제와 관련해 언급한 ‘동일 기능·동일 규제’ 원칙은 은행 등 전통 금융사들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사안이다. “빅테크에 비해 차별받고 있다”며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금융당국 수장이 민감한 시기에 ‘동일 기능·동일 규제’를 강조한 것은 빅테크 영업행위를 예전보다 더 엄격한 잣대로 규제하겠다는 뜻으로 분석된다.

당국의 방향 전환은 빅테크가 혁신을 뛰어넘어 전체 금융산업을 집어삼킬 만큼 덩치가 커졌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코로나19 사태로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하면서 빅테크는 광폭 성장을 했다. 인터넷은행인 카카오뱅크가 상장 직후 금융주 시가총액 1위에 등극한 것도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전통 금융회사들의 위기감이 크게 높아진 점도 빅테크 견제 심리를 크게 자극했다는 평가다.

특히 빅테크 플랫폼의 막강한 판매 위력에 기존 금융회사들이 종속되면 산업 자체가 크게 위축될 수 있다는 게 당국의 우려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그동안 빅테크들은 막강한 플랫폼 파워를 내세워 막대한 수수료 수익을 올리면서도 위험은 기존 전통 금융회사에 전가해왔다”며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장기적으로 전통 금융회사의 수익력이 크게 악화돼 산업 전체적으로 타격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다급해진 빅테크 기업들은 9일 금융위를 찾아가 ‘읍소’에 나섰다. 이날 회의에는 네이버파이낸셜, NHN페이코, 카카오페이, 비바리퍼블리카, SK플래닛, 뱅크샐러드, 핀다, 핀크, 한국금융솔루션, 해빗팩토리, 핀마트, 팀위크 등 13개 업체 관계자가 참석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혁신을 추구하더라도 금융 규제와 감독으로부터 예외를 적용받기보다 금융소비자 보호 및 건전한 시장질서 유지를 위해 함께 노력해 나가야 한다”며 “위법 소지가 있는데도 자체 시정 노력이 없는 경우 엄정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실제 이날 회의에서도 빅테크 기업들이 건의한 추가 유예기간 부여, 광고와 중개를 구분 지을 수 있는 당국 차원의 사전 가이드라인 수립 등은 모두 거부됐다.

이호기/정소람 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