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선거를 앞두고 정부와 여당은 말썽을 일으킬 정책을 잘 펴지 않는다. 자칫 표심(票心)을 건드릴 수가 있어서다. 그 대신 ‘퍼주기’ 같은 선심성 정책이 단골메뉴로 등장한다. 전 국민의 88%에게 1인당 25만원씩 지급하는 5차 재난지원금이 그런 예다. 제대를 앞둔 ‘말년 병장’에게도 300만원의 구직수당 신청 자격을 주고, 중소기업 다니는 청년에게 2년간 1200만원의 적립금을 지원하는 것 역시 청년층 환심을 사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역대 정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최근 이런 프레임으로 선뜻 이해하기 힘든 게 있다.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른 가계대출 규제다. 금융당국이 금융회사별로 대출 총량을 제한하자 은행부터 대출 문턱을 높였다. 몇몇 은행의 갑작스런 주택담보대출과 전세대출 중단에 세입자, 신혼부부 등 무주택 실수요자들은 ‘대출 난민’으로 전락했다. 관련 기사의 댓글은 전세금을 치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사연과 정부를 성토하는 목소리로 도배되고 있다.
선거를 앞두고 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법한데도 정부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 듯하다. ‘총량 증가율 6%’라는 획일적인 잣대만 앞세우지 말고, ‘실수요자 예외’ 같은 정교한 관리방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잇따르지만 요지부동이다. “대출 억제를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는 당국자의 강성 발언에 이제는 2금융권까지 대출 문턱을 높이고 있다.
민심이 폭발해도 정부가 꿈쩍하지 않는 걸 보고 일각에서는 금융관료들의 ‘뚝심’이라는 촌평도 나온다. 실제 금융회사의 건전성과 가계부채 관리는 금융당국의 첫 번째 책무다. 코로나 시대 각국의 초저금리 정책으로 가계부채가 늘어난 것은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한국의 증가 속도가 유독 가파르다. 지난 6월 현재 금융권 가계대출 잔액은 1705조원이다. 지난해에만 128조원(8.5%) 늘어났고 올 상반기 벌써 73조원 증가했다. 이 속도라면 2016년 이후 사상 최대 증가액을 기록한다. ‘영끌’ ‘빚투’로 인한 과잉유동성은 부동산, 주식, 코인 시장으로 흘러가 자산 가격을 전방위로 밀어올렸다. 금융긴축 시 가장 약한 고리가 가계부채가 될 것이다. 관리의 필요성은 누구나 공감한다.
그런데 그 관리 방식이 머리 좋은 금융관료의 손에서 나왔다고 보기엔 너무 거칠고 투박하다. 2016년에도 가계부채로 비상이 걸린 적이 있었다. 그해 131조원이 늘었고, 증가율은 11.5%에 달했다. 지금보다 더 빠른 속도였다. 당시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이런 말을 했다. “총량관리를 통해 가계부채를 단기에 줄이면 경제전반에 부작용이 생긴다. 총량보다는 질적 구조개선이 우선이다.” 부채 규모보다는 상환능력이 떨어지는 악성 부채를 관리하는 게 정공법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고안하기 시작한 것이 대출 원리금 상환액을 소득의 일정비율(40~60%)로 제한하는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제도다. 그때 임 위원장은 “가계부채는 소득과 금리, 부동산 시장 등 여러 변수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금융정책으로만 해결할 게 아니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이런 원칙을 배웠던 후배 관료들이 투박한 총량규제를 꺼내든 데는 말 못 할 사연이 있을 것이다. 바로 집값 잡기에 사활을 걸고 있는 청와대와 여당의 압박이다. 부동산을 진정시킬 최후의 카드로 대증요법을 동원했다는 게 당국자들의 토로다. 대출규제로 인해 당장은 민심이 끓고 표가 떨어지더라도 내년 3월 전에 전셋값이라도 안정시키면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현 정부의 최대 실책이 부동산 정책이고 보면 총량규제를 밀어붙이는 이유가 쉽게 이해된다. “부동산 문제는 자신이 있다고 장담하고 싶다”고 한 문재인 대통령의 구겨진 체면도 조금은 살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대출규제는 표밭을 일구고, 가계부채 위험도 관리하는 ‘일타쌍피’ 전략이다. 그 사이 애먼 서민 실수요자들만 궁지로 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