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의 행동주의 펀드가 SK케미칼에 보유 중인 SK바이오사이언스 주식 일부를 매각하라고 요구했다. SK바이오사이언스의 지분가치가 SK케미칼 주가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 같은 요구는 모회사와 자회사를 동시에 상장하는 ‘중복상장’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증권가는 코로나19 이후 강세장에서 비상장 자회사 상장이 대폭 늘어나 다른 기업도 비슷한 요구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행동주의 표적된 SK케미칼
8일 SK케미칼은 8.80% 급등한 29만500원에 장을 마쳤다. SK케미칼우도 19.93% 오른 16만2500원에 마감했다.
좋은 실적을 발표한 것 외에 해외 행동주의 펀드가 SK케미칼에 주주제안을 한 것이 주가를 밀어올렸다. 이날 싱가포르 헤지펀드 메트리카파트너스는 SK케미칼에 주주제안서를 발송했다. SK케미칼이 들고 있는 SK바이오사이언스 지분(68.43%)은 주당 149만2653원의 가치가 있는데, SK케미칼의 주가는 이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메트리카파트너스는 SK바이오사이언스의 지분 18.3%를 매도하고, 매각대금 4조2000억원으로 SK케미칼 주주에게 특별배당을 지급할 것을 요구했다. 메트리카파트너스가 갖고 있는 SK케미칼 지분은 5% 미만이어서 공시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행동주의 펀드의 이번 요구가 근본적으로 SK케미칼과 SK바이오사이언스, 즉 모회사와 자회사의 중복상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SK바이오사이언스는 2018년 SK케미칼에서 분사해 지난 3월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했다. 만약 SK바이오사이언스가 상장되지 않았다면 SK바이오사이언스에 코로나19 백신 개발 등의 호재가 생겼을 때 SK케미칼이 그 가치를 온전히 반영할 수 있다. 하지만 SK바이오사이언스가 상장되면서 SK케미칼이 가진 SK바이오사이언스 지분 가치는 할인돼 반영되기 시작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실적·주가가 올라도 지주사인 삼성물산 주가가 지지부진한 것과 같은 원리다. SK바이오사이언스가 백신 개발 소식으로 8월 한 달 동안 84% 오를 때 SK케미칼은 14% 상승에 그쳤다. “중복상장, 新코리아디스카운트 요인”증권가에선 비슷한 일이 이후 반복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자회사 성장에 필요한 자금마련을 위해 비상장사 계열사를 상장하는 ‘중복 상장’이 코로나19 이후 많아졌기 때문이다.
기업은 자회사를 상장시키면서 자금을 조달해 신사업에 쓸 수 있지만, 모회사 주주 입장에선 알짜 자회사가 떨어져 나가면서 주가가 할인되는 문제가 생긴다. 반대로 보면 자회사의 가치가 일부 모회사에도 반영되기 때문에 양사의 시가총액이 과대계상(더블카운팅)되는 문제도 있다.
그럼에도 상승장에 기업들은 더 많은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자회사를 잇따라 상장했다. 카카오와 카카오뱅크, SK이노베이션과 SK아이이티테크놀로지가 그 예다. 곧 상장할 현대중공업은 지배구조가 현대중공업지주-한국조선해양(중간지주)-현대중공업으로 이어지는데, 3사가 모두 상장하는 ‘트리플 상장’이 된다.
이미 일본에선 여러 상장사가 중복상장을 이유로 행동주의 펀드의 표적이 돼 왔다. 홍콩 행동주의펀드 오아시스매니지먼트컴퍼니는 중복상장 기업을 노리는 대표적 펀드다. 2017년 말엔 일본 파소나에 대해 “자회사인 베네핏원 시가총액의 7분의 1 수준밖에 안 된다”며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했고, 2018년엔 GMO인터넷이 자회사인 GMO페이먼트게이트웨이의 3분의 1 수준이라고 문제삼았다. 사회적 요구가 높아지자 일본에선 중복상장을 스스로 해소하는 상장사도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말 NTT가 자회사였던 NTT도코모의 주식을 모두 사들여 상장폐지(완전자회사화)시킨 게 대표적 예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과거 코리아디스카운트의 주 요인이 기업 간 순환출자 문제였다면 앞으로는 중복상장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슬기 기자 surug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