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장동 다 죽인다던 '미트박스', 이젠 유통 대기업들이 러브콜

입력 2021-09-08 17:41
수정 2021-09-16 15:49
김기봉 미트박스 대표는 사업을 시작한 이후 한동안 셔츠 안에 방검복을 입고 다녔다. 2014년 11월 국내 첫 축산물 직거래 플랫폼을 창업한 뒤 1~2년간의 일이다. “김기봉이 마장동을 죽인다”는 얘기가 도매업체 사이에 파다하게 퍼지면서 위협을 느껴서다. 판매자와 구매자를 연결해주고, 이들 간 거래 데이터를 축적해 투명한 가격 정보를 제시한다는 김 대표의 발상은 오랜 고기 유통 관행을 뿌리째 흔들었다.

창업 7년차인 요즘, 미트박스의 가격 정보는 서울 마장동뿐만 아니라 국내 주요 축산 도매시장의 기준이 됐다. ‘미트박스에선 1㎏에 1만원인데 우리 가게는 9900원’ 식의 거래가 이뤄진다. 연간 거래액 3000억원(올해 예상), 가입자 20만 명 규모로 성장한 미트박스는 유통 대기업들도 탐내는 업체로 떠오르고 있다. 손정의가 알아챈 축산 빅데이터 잠재력
미트박스의 잠재력을 일찌감치 알아본 건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벤처스다. 창업 후 2년이 채 안 된 2016년 3월 30억원 규모의 ‘마중물’ 투자를 단행했다. 2018년엔 쿠팡, 배달의민족, 당근마켓의 초기 투자자인 알토스벤처스와 IMM인베스트먼트 등이 230억원을 투자했다.

‘신선 배송’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미트박스의 몸값은 더 올라가고 있다. 대형 유통업체를 비롯해 CJ프레시웨이, 아워홈 등 식자재 기업, 내로라하는 국내 e커머스 기업의 투자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미트박스가 전문 투자자 및 대기업들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것은 김 대표가 구축한 방대한 축산물 빅데이터 덕분이다. 그는 기존 거래 관행의 맹점을 파고들었다. 축산물품질평가원 등에서 나오는 경매 가격도 ‘사후적’ 거래 기준이었다. 김 대표는 “정부 기관 연구원들이 시장에서 거래가 이뤄지고 난 뒤 몇몇 샘플을 조사해 가격을 제시하는 구조”라며 “완전경쟁시장을 통한 실시간 가격을 산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미트박스는 상품 공급자인 수입육업체와 육가공업체가 자신이 원하는 가격을 올려놓으면, 수요자 측인 식당 주인과 정육점, 식자재 유통업체들이 자신의 상황에 맞게 구매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김 대표가 이 같은 도전에 나설 수 있었던 건 아워홈에서 축산 바이어로 6년간 근무하고, 2005년부터 미스터보쌈 등 프랜차이즈를 창업하며 식자재를 유통해본 경험이 자양분이 됐다. 축산물 유통업계의 ‘보이지 않는 손’미트박스의 가격 빅데이터는 축산물 유통의 고질병을 해결하고 있다. 다단계 구조에서 발생하는 연쇄 가격 상승이 멈추기 시작했다. 수입육만 해도 원수입업체에서 정육점 및 식당까지 가는 데 4단계를 거친다. 각 단계를 지날 때마다 최소 3%씩 가격이 상승한다. 미트박스는 직거래를 통해 원가 상승 요인을 제거했다.

다수의 거래가 이뤄지면서 가격 변동폭도 확연히 줄었다. 김 대표는 “판매자가 서로 경쟁하는 구조여서 시장 가격이 상승해도 상호 견제로 인해 상승폭이 억제된다”며 “하락세일 때는 빠른 자금 회수를 위해 합리적인 가격에 공급하는 판매자가 나타나기도 한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미트박스에서 구매자는 15~30% 이상 저렴한 가격에 상품을 살 수 있다는 게 김 대표의 설명이다.

미트박스는 전국 단위의 ‘신선 물류망’을 구축하기 위해 오뚜기와 물류 협약을 맺었다. 냉장·냉동 시설을 갖춘 오뚜기 차량 600여 대가 전국을 누빈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