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의 빛이 그려낸 '생명의 사슴'

입력 2021-09-08 17:34
수정 2021-09-08 23:42

파스텔 톤 배경 위로 흰 사슴의 형상이 강렬한 빛을 내뿜고 있다. 나무처럼 뻗은 뿔에서는 이파리나 나비 모양의 무수히 많은 작은 형상이 신비롭게 빛난다. 회화나 컴퓨터 그래픽 작업으로 만들어 낸 것 같은 이 초현실적인 이미지는 사진작가 이정록(50)이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다.

서울 신사동 갤러리나우에서 이정록의 개인전 ‘LUCA’가 열리고 있다. 제주의 전설 속 흰 사슴인 백록을 소재로 한 사진 20여 점을 소개하는 전시다.

그의 작업은 빛으로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다. 먼저 흰 사슴 조각과 나무 등 주제가 되는 사물을 화면 중앙에 배치한다. 그 후 어둠 속에서 카메라 셔터를 열어두고 조명 등으로 사슴 조각을 수없이 비춰 은은한 색을 입힌다. 수백 번씩 스트로보를 터뜨려 나비와 나뭇잎 등 작고 선명한 모양의 무늬들을 작품에 새기기도 한다.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드라이아이스를 뿌리고 대형 선풍기로 바람을 일으키는 등 다양한 기법이 동원된다.

이처럼 몽환적인 이미지를 사진이라는 가장 사실적인 매체를 통해 표현하는 이유는 뭘까. 이 작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의 강렬한 이미지를 직접 체험하고 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생명의 기운을 사진에 담아내기 위해 10여 년 전부터 무수한 실험을 거듭했다. 그가 제주와 아이슬란드 화산 지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등을 오가며 나무와 생명 등을 소재로 촬영한 작품들은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자 연작의 이름인 LUCA는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제시한 ‘모든 생물의 공통 조상(Last Universal Common Ancestor)’에서 따왔다. 생물들의 진화 계통을 도식화한 그림과 나무, 사슴의 뿔이 서로 닮아 있다는 생각에서 착안해 정한 주제다. 주로 호수나 바다 등 야외에서 작업하던 그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 작업실을 새로 짓고 대형 수조를 설치했다. 전시는 이달 28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