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검찰총장 재직 시절 검찰이 야당을 통해 여권 정치인의 고발을 사주했다는 의혹이 대선판을 흔들고 있다. 고발 사주 사건은 지난해 4월 3일과 8일 손준성 대검 수사정보정책관(검사)이 텔레그램으로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최강욱·황희석 열린민주당 후보 등 11명에 대한 고발장을 김웅 국민의힘 의원에게 건넸고, 이를 당 법률지원단에 전달했다는 게 의혹의 핵심이다.
자료 작성자 및 전달자로 지목된 손 검사와 김 의원이 사건 내용 일체를 부인하면서 여야 간 진실 공방이 펼쳐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제보자가 문건을 조작했을 가능성을 김 의원이 제기하면서 제보자가 누구인지가 이번 사건을 풀 ‘핵심 키’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김 의원은 8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고발사주 의혹과 관련, 공식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고발장 전송 텔레그램에 ‘손준성 보냄’이번 고발 사주 의혹의 핵심은 누가 고발장을 작성하고 전달했는지다. 작성자가 누구인지, 어떤 경로를 통해 전달했는지에 따라 검찰의 국기문란인지, 단순한 공익제보인지가 드러날 것으로 관측된다.
해당 사건을 보도한 인터넷 언론사는 고발장 작성자로 손 검사를 지목했다. 문제가 된 고발장과 실명 판결문 그리고 SNS 캡처 자료 등에 ‘손준성 보냄’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했다. 하지만 손 검사는 지난 6일 기자들에게 문자를 돌려 “고발장을 작성하거나 첨부자료를 김 의원에게 송부했다는 의혹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밝혔다. 또 “근거 없는 의혹 제기와 이로 인한 명예훼손 등 위법행위에 대해 강력한 법적 조치를 취할 예정”이라며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
자료 전달자로 의심받고 있는 김 의원도 “기억 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고발장 작성과 관련된 의혹에 대해서도 “전혀 관여한 바가 없다”고 부인했다.
당사자들의 부인에도 여권에서는 고발장 내용이 “법률 전문가의 솜씨”라며 검찰의 개입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한 TV방송에 출연해 “검사들이 공소장 쓸 때 판사로부터 피고인이 죄를 짓고 있다는 선입견을 갖도록 유도하는데, 해당 글에 검사들의 입장이 체계적으로 들어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윤 전 총장 캠프에서는 “검사가 작성한 것으로 보기엔 무리한 표현이 많고, 공개 자료를 토대로 작성 가능한 수준”이라며 “시민단체나 제3자가 작성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반박했다. 또 ‘손준성 보냄’을 근거로 손 검사를 작성자로 지목한 것에 대해서도 “텔레그램 특성상 자료 전달자의 이름을 얼마든지 변경할 수 있다”며 정치 공작 가능성을 제기했다. 김웅 “제보자, 조작 경험 많았다”김 의원이 이날 한 인터뷰에서 제보자를 특정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면서 제보자의 신원에 대한 관심도 증폭하고 있다. 제보자의 신뢰성을 담보할 수 없는 만큼 사주 문건의 조작 가능성도 거론했다. 김 의원은 “제보자가 밝혀질 경우 (제보의) 신뢰성이 무너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제보자가 과거 조작 경험이 많았다는 것을 알고 인연을 끊었다”며 “내가 다른 곳에서 전달받은 자료를 (손 검사가 보낸 것처럼) 조작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김 의원의 주장대로라면 제보자의 조작으로 단순 공익 제보가 검찰의 정치 개입으로 바뀐 셈이다. 이 경우 제보자가 왜 조작했는지, 누가 배후에 있는지를 놓고서도 공방이 펼쳐질 것으로 전망된다.
김 의원은 제보자가 야권 인사라는 주장에 대해 “(여당 인사인지 야당 인사인지는) 관점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답했다. 여권의 정치 공작 가능성도 열어둔 것이다. 고발 사주 의혹을 보도한 인터넷 언론이 제보자를 야권 관계자로 특정하고 있다. 이에 민주당에서는 고발 사주 제보에 대해 국민의힘 내부 갈등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보자와 여권의 연관성이 밝혀지면 윤 전 총장의 대선 후보 사퇴 및 수사를 요구했던 여권에 역풍이 불 수도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이와 관련한 제보자는 지난 6일 공익신고자 보호법에 따라 공익신고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보자의 신분은 법률에 따라 보호받게 돼 외부에 공개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박범계 “감찰 한계 있으면 수사 전환”고발 사주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더라도 윤 전 총장의 개입 여부는 당장 파악하기 힘들 것으로 전망된다. 윤 전 총장은 해당 사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어떤 이득도 없는 고발을 왜 했겠느냐”고 항변했다.
여권에서는 손 검사가 대검 내에서 윤 전 총장의 의중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을 거론하면서 총선이라는 큰 정치적 이벤트를 앞두고 손 검사가 단독으로 행동하는 건 불가능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정황 증거만으로 무리하게 압박했다가는 ‘정치 탄압’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정치권 관계자는 “윤 전 총장이 해당 사건을 지시했더라도 구두로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혐의점을 찾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법무부와 대검은 고발 사주 의혹에 대해 합동감찰에 나섰다. 대검 감찰부는 손 검사의 컴퓨터를 분석하는 등 조사에 착수했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수사 전환 가능성도 시사했다. 박 장관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김웅 의원과 손 검사가 관련 의혹을 전면 내지는 일부 부인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감찰에 준하는 진상조사가 충분하지 않다는 판단을 조만간 내려야 할 것 같다”며 “그런 전제에서 한계가 있다면 수사로 전환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이동훈 기자 lee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