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판사 관두더니 '악마판사'로 대박낸 작가

입력 2021-09-06 16:46
수정 2021-09-06 16:47


문유석 작가는 tvN '악마판사'로 두각을 드러내기 앞서 글쓰는 판사로 화제가 됐던 인물이다. '판사유감', '쾌락독서' 등 에세이 뿐 아니라 소설 '미스 함무라비'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했다. 드라마 작가로 영역을 넓힌 것 역시 '미스 함무라비'가 드라마로 제작되면서다.

사법연수원 26기로 1997년 서울지방법원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한 후 법원행정처 정책담당관, 광주지법 부장판사, 인천지법 부장판사, 서울동부지법 부장판사를 거쳐 2018년부터 중앙지법에서 근무했지만 2020년 1월 사표를 제출했다.

법관의 자리에서 내려온 후 처음으로 선보인 작품이 tvN '악마판사'였다. 전작 '미스 함무라비'에서는 초임 판사 박차오름(고아라)의 성장기를 그렸다면 '악마판사'에서는 디스토피아 세상에서 법정을 쇼로 만드는 판사 강요한(지성)을 통해 과감하고, 역동적으로 현실의 부조리를 꼬집었다.

문 작가는 서면으로 진행된 인터뷰에서 "'미스 함무라비'가 방영될 때 '악마판사'의 콘셉트를 떠올렸다"며 "전업작가가 되니 묘하게도 시간은 훨씬 많아졌는데 힘들기는 훨씬 더 힘들더라"라면서 '악마판사' 후일담을 전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대한민국 직업만족도 1위 판사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새롭게 내놓는 '악마판사'가 그래서 부담스럽고, 더 심혈을 기울여서 집필하지 않으셨을까 싶은데요.

'악마판사'의 콘셉트를 떠올린 것도 '미스 함무라비' 방영 당시였어요. 비슷한 톤의 이야기를 또 쓰는 건 재미없으니 완전히 반대되는 톤의 이야기를 써 보면 어떨까 생각했던 것이죠. 톤 앤 매너가 다를 뿐 사실 그다지 다르지 않은 이야기들이기도 합니다. '미스 함무라비' 후반부에 박차오름이 세상으로부터 당했던 핍박과 고난들을 떠올려 보시면 그다지 장밋빛은 아니었지요.

전업작가가 되니 묘하게도 시간은 훨씬 많아졌는데 힘들기는 훨씬 더 힘들더군요. 프리랜서란 역시 퇴근이 없는 직업이고 월급쟁이가 속 편한 면도 많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본업이 따로 있을 때에는 글쓰기가 힐링이었는데, 그것이 직업이 되니까 스트레스가 되네요. 사람이란 참 간사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자유를 찾아 선택한 길이니 후회는 없습니다.


▲ '악마판사'의 종영을 맞이한 소감이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이제 더 이상 이 훌륭한 배우분들의 연기를 주말마다 볼 수 없다는 게 슬픕니다. 시청자 모드로 보고 있었거든요. 최초에는 20부작으로 구상했었는데 그게 가능했다면 더 찬찬히 이야기도 풀고 배우분들의 연기도 더 볼 수 있었겠다 싶어 아쉽기도 합니다. 성원해 주시고 함께 해 주신 시청자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 가상의 디스토피아 대한민국이란 설정을 만든 계기가 궁금합니다.

코로나 사태로 세계가 한순간에 달라지는 걸 보며 무서움을 느꼈습니다. 스페인에서는 요양원 직원들이 도망가 버려서 방치된 노인들이 집단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고, 세계 곳곳에서 경제가 붕괴되어 생계가 곤란한 이들이 폭증하고, 초강대국 대통령은 의학 전문가들의 권고를 가짜 뉴스 취급하는데 지지자들은 광적으로 열광하며 의회의사당을 습격하고.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미래에는 어떤 세상이 되고 마는 걸까 생각하다가 '블랙 미러'나 '브이 포 벤데타' 같은 근미래 디스토피아물처럼 일종의 사고 실험을 해보기로 한 것이죠.

이런 세상이라면 현실에 대한 불만을 증오와 배타주의로 해소하려는 극단주의 세력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10부 죽창 재판 때 죽창이 선언문을 낭독하는 씬이 있는데 그 첫마디가 "신념을 가진 한 사람은 이익만을 좇는 백만 명의 힘에 맞먹는다"입니다. 이는 2011년에서 노르웨이에서 무려 77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극우 테러리스트 브레이빅이 남긴 트윗 내용에서 따 온 것입니다.

이처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걱정스러운 현상들을 극 중에 녹여낸 결과 해외 시청자들이 자기 나라 얘기라며 적극 공감하는 반응들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 콘텐츠에 관한 세계인의 관심이 높은 만큼 창작자들도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글로벌한 주제들로 관심을 넓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악마판사' 속 판사들은 공정한 '청자'에 가까운 현실의 판사와 달리 능동적인 모습이 돋보입니다. 이를 두고 시청자들이 "작가님의 판타지를 실현한 게 아니냐"는 반응도 나왔습니다.

판타지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걱정을 녹여낸 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은 정치가 쇼가 되고 예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지요. 미디어가 보여주는 것들에 대중이 수동적으로 의존하는 경향이 심화될수록 숙려에 의한 민주주의는 무너지고 사회 모든 분야가 유튜버들 사이의 경쟁 원리처럼 돌아가겠지요. 영화 '헝거게임'에서처럼. 이런 미래라면 사법 역시 리얼리티 쇼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강요한은 판타지일 뿐, 현실에는 강요한을 자처하는 트럼프나 허중세가 재판장 노릇을 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죠.

▲ 악을 악으로 처단하는 판사 강요한 캐릭터를 탄생시킨 배경이 궁금합니다.

다크 히어로에 대한 열광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시스템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입니다. 문제는 그 분노가 폭주하기 시작하고 미디어와 정치권력이 이를 증폭시키며 악용하면 폭력과 극단주의, 혐오가 지배하는 사회가 된다는 점입니다. ‘악마판사’의 세계는 이미 그 악몽이 극에 달하여 시민들의 건강한 연대로 문제를 해결할 동력조차 사라진 가상의 디스토피아입니다. 강요한 식의 극약 처방 외에는 마땅한 대안조차 없는 세상이란 참 무섭고도 슬픈 세상이죠.

아직 늦지 않았으니 그런 세상을 만들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시민들은 정치, 사법, 언론 등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 '시스템'에 해당하는 이들이 다크 히어로가 되어주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기 할 일을 묵묵히 잘해서 다크 히어로가 필요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자기가 강요한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실제로는 허중세일 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강요한의 마지막 재판은 과연 재판일까요. 사실 그것은 폭탄 테러를 생중계한 것에 불과합니다. 합법적인 재판 절차가 아니고 제시된 증거 역시 동영상일 뿐 조작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요. 시청자인 우리는 전지적 시점에서 그것이 진실임을 알지만 극 중 가상의 디스토피아 대한민국에서는? 잠깐 폭로 동영상을 보고는 압도적 다수가 적법절차에 따른 재판 없이 폭탄 테러에 동의를 표시한 것입니다. 만약 허중세가 딥 페이크 기술로 정반대 영상을 그럴듯하게 조작하여 요한의 동조자들을 처단하려 들었다면 어땠을까요.

묘한 것은 14부 전기의자 사형집행에 대해서는 극 중 시민들이 불편함을 느끼며 망설이는데, 16부 폭탄 테러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찬성했다는 점입니다. 누르는 행위와 상대방의 즉각적인 고통 사이의 직접성, 노골성의 차이일 뿐 본질은 다르지 않은데 말이죠. 현대 심리학의 연구결과가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듯이 우리 인간들은 놀라울 만큼 쉽게 어떤 방향으로 유도되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치주의라는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지요.

극 중 악역들이 처단당하고 새롭게 그 자리를 차지한 엘리트들 역시 전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행태들을 보입니다. 결국 더디지만 많은 이들의 노력에 의해 시스템이 온전하게 바뀌어야 진정한 변화가 오겠지요. 가온의 독백, '요한이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가 이 이야기의 진정한 마무리라고 생각합니다.


▲ 극 중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성 역할을 반전시킨 듯한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캐릭터들을 만들 때 아예 성별을 무시하고 만들었습니다. 정선아가 서정학에게 당했던 성폭력 등 특정한 맥락 외에는 성별이 큰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차경희는 그저 야심 만만한 권력자일 뿐이고, 윤수현은 첫사랑을 지키고 싶어 하는 형사일 뿐이죠. 둘 다 한국 드라마에 남성으로 많이 나오는 익숙한 캐릭터들입니다. 반대로 김가온 역할은 여성 캐릭터에 부여하는 경우가 많겠지요. 인습적인 성 역할에 갇혀 있는 캐릭터들은 뻔해서 재미없고, 그렇다고 여성들은 모두 주체적이어야 하고 남성들은 납작해도 상관없다는 식의 편향도 작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다 개별적이죠.

▲ '악마판사'를 집필하시면서 가장 공을 들였던 장면이나 혹은 고민했던 장면이 있다면 어떤 장면일까요?

우선 13부 엔딩 수현의 죽음 장면입니다. 요한에게는 이삭이 있고, 가온에게는 수현이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 삶을 놓지 않게 만들어 준 유일한 존재들이죠. 대본 초고에는 이삭이 요한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씬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없어져야 아버지가 요한을 학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였지요.

종교적이기까지 한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총을 맞아 죽어가는 수현이 가온의 이마 상처를 보면서 "괜찮아? 피 나잖아"라며 가온부터 걱정하는 씬을 썼습니다. 이 비극적인 죽음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이 정선아의 잔혹한 큰 그림이었음이 밝혀지는 15부 엔딩까지 극은 파국을 향해 달려갑니다.

신들의 불가해한 변덕으로 잔혹한 운명을 맞는 그리스 비극처럼 크게 부각되지는 않은 씬이지만 12부 초반, 요한을 그림자처럼 돕는 K가 가온에게 처음으로 속내를 털어놓으며 요한 곁에 있으면 결국 모든 걸 잃고 말 거라고 쓸쓸하게 말하는 씬도 기억에 남습니다.

사실 이 씬은 영화 '렛 미 인'을 생각하면서 썼습니다. 외로운 뱀파이어 이엘리의 곁에서 그녀를 지키며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 중년 사내, 그리고 같은 운명을 스스로 짊어지는 소년 오스칼의 이미지가 그 씬을 쓸 때 자꾸 떠오르더군요.


▲ 지성, 김민정, 진영, 박규영 배우를 비롯해 장영남, 안내상, 김재경, 백현진 등 많은 배우들의 활약으로 '악마판사'가 멋지게 완성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배우 분들에게 연기 칭찬을 해주신다면요?

정말 모든 배우분들이 찬란하게 빛나는 연기를 해 주셨습니다. 사실 '악마판사'는 이질적인 요소가 가득한 혼돈 같은 이야기입니다. 만화처럼 과장된 디스토피아 설정에 고전 비극의 서사, 연극적인 문어체 대사, 의도된 찝찝함과 불편함. 제가 좋아하는 이런 요소들을 과잉될 만큼 집어넣고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배우분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성 배우와 김민정 배우가 없었다면 강요한과 정선아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누가 살릴 수 있었을까요? 가혹한 운명 속에 고통받는 힘든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 주신 진영, 박규영 배우도, 각기 다른 개성의 악역을 맡아 광기 어린 연기를 해 주신 장영남, 안내상, 백현진 배우도, 소박하지만 공감 가는 인물을 연기해 주신 김재경 배우도, 그 외에도 단역 분들까지 모든 배우분들의 훌륭한 연기가 대본의 이상함과 부족함을 메워 주셨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 '악마판사' 제작발표회에서 지성 배우가 작가님과 친분을 언급하셨는데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고, '악마판사'라는 작품을 함께하면서 어떤 대화를 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공통의 지인을 통해 우연히 인사를 하게 된 이후 좋은 인연을 이어오게 되었고, 강요한이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어떻게 만들어갈지에 관하여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 차기작도 궁금해집니다. 다음 작품도 법정물이 될까요? 아니면 판타지가 될까요?

저는 창작자 이전에 온갖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사랑하는 소비자이고요, 법정물 외에도 코믹, 휴먼, 스릴러, SF, 애니메이션 등 제가 사랑하는 다양한 장르,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쓰고 싶습니다. 이번에 다크한 장르물을 썼으니 다음번에는 반대로 밝고 쉽고 낙관적인 이야기를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요.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