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배 수익은 이제 명함 내밀기도 어렵죠.”
벤처캐피털(VC)이 스타트업 투자로 수십 배에서 많게는 1000배에 달하는 ‘잭팟’을 터뜨리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벤처투자시장에 막대한 투자 자금이 몰리고 기업 몸값이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상승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벤처투자 규모는 4조3045억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올해도 상반기에만 3조730억원에 달해 이변이 없는 한 연간 최대치를 다시 한 번 경신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국내 벤처투자조합 수는 1077개로 처음으로 1000개를 넘어섰다. 이렇다 보니 유망하다 싶은 스타트업에는 VC들이 돈 보따리를 풀며 서로 높은 몸값을 제시하고 있다.
당근마켓 몸값 3년 새 70배↑중고거래 플랫폼 당근마켓은 지난달 1789억원 규모 시리즈 D 투자 유치 과정에서 기업가치를 3조원으로 평가받았다. 2018년 57억원 규모 투자 과정에서 몸값은 400억원, 2019년 400억원대 투자 유치 당시 몸값은 3000억원이었다. 3년 새 몸값이 70배 뛰었다. 당근마켓의 초기 시절을 함께한 캡스톤파트너스, 알토스벤처스, 소프트뱅크벤처스 등은 수십 배 차익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2019년 말 배달의민족(우아한형제들)은 독일 딜리버리히어로에 매각되면서 약 4조7500억원의 몸값을 인정받았다. 가장 초기였던 2011년에 투자를 진행한 본엔젤스는 3억원으로 지분을 사들여 3000억원에 되팔았다. 알토스벤처스도 2012~2014년 70억원 안팎을 투자해 9000억원을 거머쥐었다.
국내 최대 암호화폐거래소 업비트를 운영하는 두나무는 지난 4월 DSC인베스트먼트로부터 400억원을 추가 투자받으면서 몸값이 6조원대로 평가됐다. 5개월이 지난 지금은 10조원대 몸값이 거론되고 있다. 2월 투자 유치 당시에는 기업가치가 1조5000억원 수준이었다. 6개월 새 몸값이 여섯 배 불어난 것이다. 이곳에 초기 투자한 VC들은 1000%대 수익률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VC업계는 덩달아 초호황이렇다 보니 VC는 물론 수조원의 자금을 보유한 대형 사모펀드 운용사(PE)까지 초기 기업 투자에 앞다퉈 나서고 있다. 카카오모빌리티와 카카오뱅크에 투자해 대박을 앞둔 글로벌사모펀드 TPG, 야놀자에 초기 투자한 국내 PE 스카이레이크 등이 대표적이다. 그동안 주로 VC들이 유망한 기업을 발굴해 투자하고 PE가 궤도에 오른 기업의 경영권을 인수하거나 수천억원 규모 대규모 투자를 집행했다면, 이제는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자금이 쏠리는 현상이 더욱 가속화하는 양상이다.
VC 자체의 몸값도 고공행진 중이다. 미래에셋벤처투자와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는 올 들어 주가가 70%가량 올랐다. VC 대장주로 꼽히는 아주IB투자는 약 40% 상승했다. 같은 기간 코스닥지수 상승률은 7% 정도다. 미래에셋벤처투자는 올 상반기 영업이익이 다섯 배 넘게 올랐다.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도 매출과 영업이익이 각각 두 배, 세 배가량 늘어났다. VC ‘줄 세우기’에 나선 스타트업자금이 몰리는 특정 업종에서는 VC들이 투자하기 위해 줄을 서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시장 자체가 작았던 과거에는 스타트업에 VC가 ‘갑’이었지만 지금은 관계가 뒤바뀐 것이다. 시리즈 A~B단계의 플랫폼, e커머스 업종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일각에선 고평가된 스타트업들이 일부 산업군에 지나치게 몰려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올 7월까지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사)으로 인정된 15개 회사 중 엘앤피코스메틱(화장품), 에이프로젠(바이오), A사(도·소매업)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e커머스나 플랫폼 같은 기업·소비자 간 거래(B2C) 업종이다. 한 중대형 VC 대표는 “미국 시장은 실리콘밸리를 필두로 ‘테크’ 업종 유니콘 기업이 많은 데 비해 한국은 빈약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최근 시리즈A 투자를 받은 e커머스 스타트업 대표는 “너무 많은 투자자가 찾아와 투자 설명회(IR)를 일부 VC 대상으로만 했다”며 “VC들이 재무적 지원뿐만 아니라 경영 지원 계획을 밝히는 등 서로 ‘당근’을 제시하고 있다”고 했다. VC업계 관계자는 “시장에 몰려든 자금에 비해 좋은 스타트업은 한정적”이라며 “이 때문에 경험(트랙 레코드)이 많은 VC만 스타트업들로부터 ‘초대’받는 상황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김종우/차준호 기자 jong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