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유령 기술'로 전락한 파이로-SFR

입력 2021-09-02 17:21
수정 2021-09-03 00:08
원자력발전소의 사용후 핵연료(폐연료봉)를 재활용하는 ‘파이로-SFR’ 기술에 대한 한·미 원자력연료주기공동연구(JFCS) 보고서가 미국 정부에 의해 승인된 사실이 지난 1일 본지 보도(A1면, 13면)로 알려졌다.

폐연료봉엔 방사성 원소 수십 종이 가득 차 있다. 이 가운데 1%가량을 차지하는 초우라늄 원소(TRU)가 인류 사회의 중대한 문제다. TRU는 수만~수십만 년이 지나도 식지 않는 치명적 방사선을 내뿜는 플루토늄, 넵투늄, 아메리슘, 퀴륨 등을 말한다.

TRU에서 플루토늄을 뽑아내 핵무기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TRU를 핵 비확산 기조에 맞게 처리하는 기술은 어느 나라도 확보하지 못했다. 현재 폐연료봉은 무작정 쌓아두거나 지하 깊은 곳에 파묻는 수밖에 없다. 파이로-SFR은 이런 패러다임을 바꿀 세계적 신기술이다. 상용화하면 폐연료봉 부피와 질량을 각각 20분의 1, 50분의 1로 줄이면서 방사선량을 1000분의 1 이하로 감소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한·미 연구진은 1회당 폐연료봉 4~5㎏을 처리할 수 있는 공학 기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과학기술은 기초연구→실험실→공학 연구→실증 연구 및 상용화로 발전한다.

그런데 정작 기술개발 주체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입장이 석연치 않다. 본지 보도 직후 “JFCS 보고서는 한·미 간 연구 과정과 결과를 기록한 것으로, 파이로-SFR의 타당성 등에 대한 결론을 담고 있지 않다”고 설명자료를 냈다. 이어 “실증 연구 및 상용화 계획은 마련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양국 원자력 최고 전문가들이 지난 20여 년간 연구해 미국 승인을 받은 보고서를 두고 주무부처가 ‘결과는 있는데 결론은 없다. 후속 연구를 할지는 아직 모르겠다’는 ‘희한한’ 입장을 내놓은 것이다.

정부의 ‘탈원전 기조’를 의식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파이로-SFR이 발전하면 ‘원전은 위험하다’는 논리의 한 축이 무너지기 때문에 연구 성과를 애써 축소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과학계 한 원로는 “파이로-SFR은 과학의 영역이며, 정치가 범접해서는 안 될 진리의 세계”라며 “혹시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때문에 결과를 은폐하는 것이라면 이는 중대한 문제”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파이로-SFR이 향후 세계 원전 시장을 주도할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 인도 등은 이미 파이로-SFR 개발에 한창이다. 과기정통부는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앞으로 연구 방향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위원회는 비(非)원자력계 인사들로 꾸려질 전망이다. 천신만고 끝에 미래 원천기술을 확보해 놓고도 경쟁국에 주도권을 뺏기는 건 아닐까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