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 가득 야생화가 전하는 수채화의 신비

입력 2021-08-30 17:44
수정 2021-08-31 00:44

유화 붓을 짧게 잘라 만든 거칠고 예리한 붓에 수채화 안료를 묻힌다. 붓으로 종이를 툭툭 칠 때마다 표면에는 상처가 나고, 그 틈으로 색이 깊숙이 스며든다. 곧이어 종이가 마르면서 틈새가 닫히면 밀도 높은 빛깔이 번진다.

이렇게 하나하나 그려 넣은 수많은 들꽃과 풀들이 캔버스 가득 몽환적인 느낌을 연출한다. 화면 곳곳을 수놓은 흑과 백의 덩어리들도 무게감과 신비로움을 더한다. 수채화 대가 정우범 화백(75)이 ‘판타지아’ 연작에 담아낸 풍경이다.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정 화백의 개인전 ‘판타지아-Fantasia’가 열리고 있다. 오방색의 야생화가 모인 꽃밭을 수채화 물감과 먹,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근작 25점과 풍경화 2점을 펼친 전시다.

수채화는 유화에 비해 접하기 쉽고 친숙하다. 그래서인지 미술시장에서도 수채화는 유화에 비해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정 화백은 이런 편견에 아랑곳하지 않고 1985년 화실을 열었을 때부터 36년간 수채화 외길만 걸었다.

“선친께서 서당을 하셨던 덕분에 어릴 때부터 먹에 익숙했어요. 수채화는 먹과 비슷한 성질이 있는데, 유화에 비해 담백하고 맑아 우리 정서와 잘 맞죠. 수채화로도 얼마든지 유화보다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정 화백의 화풍은 독창적이다. 그의 작품에는 물감이 흐르고 번지는 수채화 특유의 성질이 살아 있으면서도 묵직함과 깊이를 갖췄다. 기법도 특이하다. 먼저 수채화용 고급 수제 종이에 물을 적신다. 그 위에 물감을 묻힌 거친 붓으로 표면을 문지르듯 그림을 그린다. 그러면 종이와 수채화 물감이 혼연일체가 되면서 특유의 아련하고 오묘한 색감과 질감이 드러나게 된다. 물감이 깊이 스며든 덕에 색이 변하거나 빠지는 일도 드물다. 그는 “색을 종이의 모세혈관까지 침투시키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정 화백이 화단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1995년. 유엔무도대사를 지낸 ‘태권도 박사’ 이기정 씨와의 인연으로 미국 워싱턴DC 미셸갤러리에서 연 전시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국내 화단에서도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김창실 전 선화랑 회장이 전라도 광주에 있던 그를 서울 미술계에 소개하면서 본격적으로 명성을 날리게 됐다. 이후 정 화백은 활발한 작품 활동과 함께 대만 쑨원미술관(2017년)과 중국 상하이 인근 우시 피닉스예술궁전미술관(2018년)에 잇달아 초대되는 등 국내외 미술계에서 두루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겨울 목화밭과 설경 등 풍경화와 석불 그림부터 정물화까지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던 그는 2007년부터 주로 꽃을 그려왔다. “2007년 터키 이스탄불의 무스타파 케말 대통령기념관 앞 화단에 펼쳐진 꽃들을 보고 ‘이거다’ 싶었어요. 그곳에서 지상 천국 같은 느낌을 받았거든요.”

이번 전시에 나온 판타지아 연작은 분꽃과 달개비, 맨드라미 등 정 화백이 좋아하는 동서양 야생화가 한데 모인 꽃밭을 통해 어린 시절과 동심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그림들이다. 화면 구석에서는 흑색과 백색으로 마련한 빈 자리들이 돋보인다.

차분함과 신뢰를 상징하는 흑색, 순수를 상징하는 백색으로 여백을 마련해 구성에 완성도를 더하고 꽃의 화려함을 부각시켰다는 설명이다. ‘판타지아(고성)’에는 먹으로 성벽을, 다른 작품에는 동요 ‘고향의 봄’ 가사를 써넣는 등 다양한 변주를 줬다. 전시는 9월 18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