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 묻고 화제성 챙기면 끝?…제자리 걸음인 '아이돌 선발전' [연계소문]

입력 2021-08-29 14:00

"실력이 좋아 눈여겨 본 참가자였는데 '항미원조' 찬양글을 올렸다는 걸 알게 되니 어쩐지 투표는 꺼려지더라고요."

Mnet '걸스플래닛999'를 보고 있다는 한 시청자는 이같이 말했다. '프로듀스 101' 시리즈의 생방송 투표수 조작 논란의 여운이 다 가시진 않았지만, 평소 아이돌을 좋아하는 탓에 '걸스플래닛999'도 보기 시작했다는 그는 초반부터 뛰어난 실력으로 눈길을 끈 중국인 참가자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해당 참가자가 방송 전 항미원조(抗美援朝) 지지글을 올린 이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응원까지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털어놨다. 항미원조는 6·25 전쟁을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북한을 도운 정의로운 싸움으로 규정하는 중국의 사상이다.

내 손으로 직접 나의 아이돌을 뽑는다는 취지로 기획됐던 '프로듀스 101' 시리즈가 생방송 투표수 조작 물의를 일으켜 '오디션 명가'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린 Mnet이 '걸스플래닛999'로 본격적인 자존심 회복에 나섰다. 아이오아이, 워너원, 아이즈원의 흥행 사례 덕에 지원자는 한국, 중국, 일본에서 총 1만 3000여 명이나 몰렸다.

중요한 것은 시청자와의 신뢰 회복이었다. 투표수 조작이라는 오명을 썼던 만큼, Mnet은 별도의 외부 플랫폼 유니버스를 통해 투표를 진행했다. 모든 투표를 유니버스에서 받고, 제작진은 이를 점수화한 최종 데이터만 받을 수 있도록 방식을 개선했다. 또다시 시청자들로부터 투표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기에 '달라진' 모습을 통해 신뢰를 얻겠다는 의지로 읽혔다.

하지만 공정성보다 더 논란이 됐던 것은 중국 참가자들이었다. '걸스플래닛999' 방송 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프로그램의 방영을 막아달라는 청원이 올라왔는데, 이는 '프로듀스 101' 시리즈 조작 논란과는 별개의 중국인 관련 이슈 때문이었다. 일부 참가자들이 웨이보를 통해 항미원조 지지글을 올린 사실이 알려지면서였다.


예비 시청자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이와 관련한 입장은 방송 당일이 되어서야 겨우 들을 수 있었다. 윤신혜 CP는 제작발표회에서 "걸스플래닛999'는 탈 정치적인 글로벌 문화 이벤트로 생각해 주셨으면 한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스포츠 행사에서도 정치나 종교, 인종차별적 발언을 금지한다"면서 "참가자들 모두 정치적이나 외교적인 발언은 하지 않고 서로 존중하는 걸 약속하고 경연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논란을 어느 정도로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 어떠한 고민과 논의를 거쳐 동행을 결정하게 되었는지 등의 요지는 쏙 빠진 원론적인 말만 짧게 전했다. 결국 비판 여론이 가라앉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레이스는 시작됐다.

시청률은 0%대를 전전하고 있지만, 프로그램은 높은 화제성을 자랑하고 있다. 논란은 논란대로 분리하겠다는 Mnet의 전략이 제대로 먹혀들어가고 있는 듯한 결과다. 콘텐츠영향력지수(CPI)에서 3주 연속 1위를 차지했고, 유튜브에서 프로그램 관련 동영상 조회 수는 1억 뷰를 훌쩍 넘겼다. 동영상 플랫폼 틱톡에서는 '걸스플래닛999'로 검색되는 게시물이 9억 뷰를 돌파했다.

Z세대를 타깃으로 하는 아이돌 프로그램의 경우, TV 시청률보다는 온라인 플랫폼이 글로벌 인기 지표로서 더 큰 영향력을 갖는다. 데뷔 그룹의 글로벌 인기로도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널리 공유하고 재가공할 수 있는 콘텐츠 위주로 화제성을 높이는 전략이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앞서 Mnet '아이랜드' 역시 시청률은 고전했지만 프로그램을 통해 결성된 엔하이픈은 국내외로 뜨거운 인기를 얻고 있다. 엔하이픈이 '아이랜드' 덕을 본 게 아니라 반대로 Mnet이 엔하이픈의 덕을 보고 있다는 말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엔하이픈이 글로벌 시장에서 성과를 나타내자 돌연 Mnet은 이들의 데뷔작인 '아이랜드'가 재조명받고 있다고 홍보하기도 했다.


다만, 화제성을 위해 과도하게 경쟁을 강조하고 참가자 간의 신경전에 집중하는 등 고질적인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당초 제작진이 타 문화권 소녀들이 만나 K팝을 매개로 소통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조명한다면서 '착한 오디션'을 공언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흐름이다. '프로듀스 101' 시리즈가 묘하게 오버랩되는 이유다.

비난 여론 속에서도 강행한 한·중·일 K팝 걸그룹 결성 프로젝트다. 내 손으로 만드는 아이돌이라는 매력적인 콘셉트로 데뷔 전부터 팬덤을 다지니 어쩌면 팀의 성공은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것일 수 있다. 제작진 역시 이를 잘 알기 때문에 다시 같은 콘셉트를 재활용해 시청자들을 '가디언'이라고 부르며 투표를 해달라고 독려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아무리 온라인 영향력 및 화제성이 중요한 시대일지라도, 0%대의 시청률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시청자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점만 잡아내는 것이 아닌, '오디션 명가'로서의 명예를 단번에 꺾어버린 구태에서 반드시 벗어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