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중립 실현을 목표로 한 각국 정부와 기업들의 움직임이 원자재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중국 등 주요 철강 생산국이 탄소 배출량 감축을 위해 철광석 대신 고철 활용 비율을 높이면서 철광석 가격은 급락하고 고철가는 급등하고 있다. 전기차, 신재생에너지 등 친환경 수요 증가는 리튬, 니켈, 알루미늄 등 비철금속 폭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원자재 가격의 출렁임은 일시적 현상이 아닌, 탄소중립이 불러온 산업 재편에서 비롯된 구조적 변화라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철광석·고철 이례적 ‘디커플링’최근 원자재 시장 변동은 철강산업에서 촉발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철강 생산의 원료인 철광석과 고철 가격이 따로 움직이는 ‘디커플링(탈동조화)’이라는 이례적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한 달 전까지 t당 220~230달러 수준이던 철광석 가격은 최근 130~140달러 선으로 떨어지며 역대 최대 단기 낙폭을 보였다. 반면 고철 가격은 t당 60만원대를 돌파하며 1년 전에 비해 두 배 이상 상승했다.
철광석은 주로 코크스를 태워 발생하는 열을 활용하는 고로에서 쇳물로 만들어진다. 고철을 넣고 전기를 연료로 활용하는 전기로에서도 쇳물을 뽑는다. 원가 절감을 위해 고로 공법으로 쇳물을 뽑을 때도 고철을 10% 정도 넣는다. 철광석과 고철 가격은 석유와 달리 지정학적 요인의 영향도 적다 보니 조선, 자동차, 전자, 건설 등 전방산업 경기에 따라 비슷한 움직임을 보여왔다.
세계 철강 생산의 약 50%를 차지하는 중국이 이런 가격 동조화 현상에 균열을 냈다. 중국은 2060년까지 탄소중립 실현을 목표로 대대적인 철강산업 구조 개편에 나섰다. 중국 전체 이산화탄소 배출의 15%를 차지하는 철강산업의 변화 없이 목표 달성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중국 정부는 철강 감산과 함께 생산과정에서 다량의 탄소를 배출하는 고로 기반 생산을 줄이고 전기로 비중을 확대하는 산업 재편에 들어갔다. 탄소 배출량이 고로 공법의 25% 수준인 전기로 비중을 현재 전체 철강 생산의 10% 수준에서 2030년 40%까지 늘리는 게 핵심이다.
실제로 중국은 7월 조강(쇳물) 생산량을 전년 동기 대비 약 8% 감소한 8679만t으로 줄였다. 반면 고철 활용 비율을 높여 중국 내 고철 수요는 10~20%가량 급증했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일본 한국 러시아 등 고로 비중이 높은 철강 생산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움직임”이라며 “일시적 현상이 아닌, 구조적인 변화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新자원전쟁 대비해야”친환경 모빌리티의 핵심인 2차전지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비철금속 시장도 요동치고 있다. 전기차 배터리 핵심 소재인 양극재 원료인 리튬, 니켈을 비롯해 특수강의 핵심 원료인 텅스텐, 코발트, 마그네슘 등의 가격이 올 들어 폭등세를 이어가고 있다.
상당수 원자재를 수입에 의존하는 국내 기업들은 대응책 마련에 비상이 걸렸다. 철강업계에선 안정적인 고철 공급망 구축이 과제로 떠올랐다. 그간 국내 철강업체들의 고철 수입 비중은 20%에 불과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도 포스코가 고철 활용 비율 확대에 나서면서 공급 부족이 예상되고 있다. 이에 철강회사들은 해외 수입원 다변화를 추진 중이지만 녹록지 않다. 중국 러시아 등 주요 고철 생산국이 관세 장벽을 쌓으며 사실상 고철 수출길을 막고 있어서다.
배터리 제조사와 소재 업체들은 원자재 확보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최근 호주 원자재 업체들과 장기 공급 계약을 잇따라 맺으며 향후 10여 년간 전기차 250만 대분 배터리 제조에 쓰일 니켈 14만1000t과 코발트 1만4000t을 확보했다. 포스코도 지난 5월 호주 니켈 광업·제련 기업에 2700억원을 투자해 안정적 공급 기반을 마련했다.
전문가들은 원자재 시장의 구조적 변화가 ‘신(新)자원전쟁’을 불러올 수 있는 만큼 정부 차원의 원자재 확보 전략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류성원 전국경제인연합회 산업전략팀장은 “정부가 최근 산업용 희소금속 비축물량 확대에 나섰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며 “막대한 투자비용과 실패 가능성을 안고 있는 해외자원 개발에서 정부가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