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추리소설 여왕'이 남긴 英 역사의 흔적

입력 2021-08-19 18:01
수정 2021-08-20 02:13
역사학자를 집에 가두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코로나19로 반강제적으로 집에 갇힌 역사학자 설혜심은 ‘추리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을 다시 읽었다. 크리스티의 생애와 당시 시대상이 새롭게 보였다. 그렇게 책 한 권이 탄생했다. ‘역사가가 찾은 16가지 단서’란 부제가 붙은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다.

저자는 크리스티의 작품을 통해 20세기, 특히 1·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무렵의 영국 사회와 문화를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독자와 함께 퍼즐을 풀기 위해 구체적인 정보를 줘야 하는 추리소설 특성상, 크리스티의 작품이 등장인물은 허구지만 배경은 모두 철저하게 당시 현실을 따르고 있는 덕분이다.

《파도를 타고》에 등장하는 롤리 클로드는 건장한 젊은이지만 군대에 가지 않고 마을에 남아 있다. 오히려 그의 약혼녀 린 마치몬트는 먼 해외 전장을 누볐다. 2차 세계대전에서 고전하던 영국이 징집 대상을 20~30세 미혼 여성과 아이가 없는 독신 여성으로 확대했던 시대상을 반영한 설정이다. 반면 남자라도 성직자, 의사, 교사, 열차 기관사, 농부 등 보호 직업군은 징집이 면제됐다.

크리스티의 작품에는 시대상뿐 아니라 작가 개인의 경험과 취향도 녹아 있다. 그의 소설에는 유달리 집이 많이 나온다. 스타일즈저택, 할로저택, 엔드하우스처럼 아예 제목에 집을 내세운 작품도 많다. 저자는 “사실 크리스티는 오늘날의 기준에서 볼 때 ‘부동산 투기꾼’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집을 많이 사고팔았던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누구보다 사실적인 독살 사건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데는 두 차례 세계대전 중 간호사와 약제사로 일했던 경험이 바탕이 됐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