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 기사가 알파고에 1 대 4로 패했던 충격적 사건 이후 5년이 지났다. 그 사이 딥러닝 기술은 더 진화하면서 의료, 행정, 경영, 오락 등 여러 분야에서 응용되는 성과를 낳고 있다. 레이 커즈와일이 말했던 특이점 시대가 정말 도래할 것인가? 이와 동시에 인간의 일자리는 전부 인공지능(AI)에 뺏기고 말 것인가?
미국의 저명한 기술문명 비평가인 조지 길더는 《AI로 게임하기(Gaming AI)》에서 희망과 불안으로 뒤섞인 이 전망을 새로운 관점에서 진단한다. 그는 일단 기술로서 AI의 역할과 발전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AI는 단지 기술일 뿐이며, 인간처럼 사고하는 괴물 AI가 등장해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는 우려는 무지의 소산이라고 본다.
첫째, AI와 빅데이터 시스템이 봉착할 수밖에 없는 물리적 제약이 있다. 직렬 연산이든 분산병렬 시스템이든 저장장치가 방대해지고 물리적 연결망이 포화상태에 달하면 정보 접근과 처리 능력은 둔화되고, 더 많은 자원과 전력 에너지를 소모할 수밖에 없다. 바둑 한 판을 둘 때 인간 두뇌는 12~14와트(W) 수준의 에너지로 충분하지만, 슈퍼컴은 기가와트(GW)급 전력을 소모해야 한다. 빅데이터 처리를 위해 등장한 방대한 분산 병렬 클라우드망이 소모하는 전력은 새로운 골칫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 AI에 대한 환호보다 AI에서 전력을 절감하는 기술이 첨예한 화두가 될 것이다. 앞으로 컴퓨터 처리 능력은 초당 CPU 속도가 아니라 와트당 처리 속도로 측정돼야 한다.
둘째, 뇌를 모방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도는 결코 영토가 아니다. 사람들은 자꾸 AI라는 지도를 마치 현실과 동일시하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두뇌는 적어도 겉으로는 뉴런의 연결망처럼 보인다. 하지만 연결 그 자체는 두뇌가 아니다. 라이프니츠가 뇌를 기계라고 간주한 것처럼 두뇌는 기계와 비슷한 속성이 있지만, 기계 이상의 그 무엇이다.
뉴런의 수가 300개이고 그 연결선이 7000개에 불과한 꼬마선충의 뇌조차도 그 구조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아직도 미지의 영역이다. 하물며 인간의 뇌는 말할 것이 있을까? 연구자들은 화려하게 채색된 뇌 지도, 일명 커넥톰(connectome)을 작성하거나 인공신경망으로 뇌기능을 모델링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결과는 지극히 적다.
셋째, 프로그램되는 대상과 프로그래머는 다르다. 알고리즘 정보이론의 창시자인 그레고리 채틴은 괴델의 불가능성 정리를 현대 정보기술(IT) 정보 시스템 버전으로 다시 소환했다. 컴퓨터와 같은 결정론 시스템은 저(低)엔트로피 기계다. 반면에 창의성은 예측 불가능한 비트의 개입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고(高)엔트로피 활동이다. 창의성은 결정론 시스템과 양립 불가능하다.
AI는 인간의 뇌를 단지 결정론의 형태로만 모델링할 수 있다. 바둑은 이 가정을 충족했기 때문에 AI로 구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정론 사고를 넘어선 인간 마음의 능력, 예컨대 동일한 기호가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세계는 전혀 AI로 시뮬레이션할 수 없다. 아무리 우연과 불확실성의 세계라 해도 프로그래머에 의해 AI 코딩으로 대입되는 순간 결정론으로 치환된다. 이 대입을 수행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AI 바깥에 있는 프로그래머밖에 없다. 프로그래머로서 인간은 블랙스완을 인지하고, 예측하지 못했던 기업가적 경이를 경험하는 고엔트로피 존재다. 인간은 저엔트로피 기계인 AI 바깥에 지배자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코딩 기호체계는 상징일 뿐 현실 세계가 아니다. 데이터 센터는 프로그래머가 아니며, 자율주행차 시스템은 운전자가 아니다.
기술로서 AI의 성장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인간의 일자리가 다 사라지고, 인간이 AI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주장은 터무니없다. 인간의 두뇌는 AI 시대에 맞춰 다른 종류의 멋지고 참신한 일거리를 끝없이 만들어낼 것이다.
송경모 < 고려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