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26% "백신 거부"…종교·정치색이 좌우

입력 2021-08-13 17:28
수정 2021-09-30 11:41

누구나 언제든 코로나19 백신을 맞을 수 있는 ‘백신 부국’인 미국. 하지만 백신이 부족한 국가에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일부 미국인이 백신 접종에 강력 반발하며 소송과 시위를 불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인 중 최대 4분의 1 이상이 백신 기피자라는 추정까지 나온다.

하지만 델타 변이 바이러스가 확산하면서 백신 거부자의 설 자리도 좁아지고 있다. 기업이 직원에게 백신 접종을 의무화하기 시작했다. 백신을 거부하는 근로자를 해고하는 사례도 곧 나올 가능성이 높아졌다. 전방위적인 압박이 백신 기피자의 고집을 꺾을 수 있을까. 미국인 14~26% 백신 안 맞을 수도
미국의 명문 주립대인 인디애나대, 코네티컷대, 매사추세츠대 등은 최근 학생들로부터 소송을 당했다. 이들 대학이 백신 접종을 마친 학생에게만 캠퍼스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해서다. 백신이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접종 의무화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 대학생들의 주장이다.

조지메이슨대가 백신을 맞지 않은 교직원에게 성과급을 올려주지 않겠다고 통보하자 해당 대학의 법학과 교수는 소송을 냈다. 코로나19와의 전쟁 최전선에 있으며 감염 위험이 높은 병원 근로자마저 백신 접종 지침을 거부하면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과학계에서는 이런 현상을 ‘백신 기피(vaccine hesitancy)’라고 부른다.

갤럽을 비롯한 미 여론조사업체들은 미국인 중 14~26%가 앞으로도 영영 백신을 맞을 가능성이 없는 ‘강경파’로 보고 있다. 백신이 넘쳐나는데도 미국의 백신 접종률이 정체에 빠진 이유가 이들에게 있다. 12일(현지시간) 미 질병예방통제센터(CDC)가 집계한 18세 이상 성인의 백신 접종률(1회 이상)은 71.5%다. 한 달여 전인 지난달 3일 접종률은 67%였다. 그동안 델타 변이가 미국을 강타했는데도 백신 기피자 중 상당수가 여전히 접종을 미룬 결과다. 종교, 정치성향 등과 연관일부 미국인이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백신 부작용에 대한 걱정, 음모론의 영향 등이 거론된다. 하지만 조사 결과 백신 기피자에게는 명확한 공통점이 드러나고 있다. 바로 종교와 정치성향이다.

미국 공공종교연구소(PRRI)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가장 강력히 백신을 거부하고 있는 집단은 개신교 복음주의를 믿는 백인이다. 지난 6월 기준으로 이 중 24%가 백신을 맞지 않겠다고 응답했다. 지난 3월 실시된 동일한 조사에서는 26%가 백신을 거부한다고 답했다. 델타 변이 확산에도 요지부동이다.

복음주의자는 전통적인 공화당 지지층으로 꼽힌다. 이 중 상당수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투표했고 보수 미디어인 폭스뉴스를 애청한다. 갤럽의 최근 조사 결과 공화당 지지자 중 46%가 백신 접종을 원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반면 민주당 지지자 중 백신을 거부한 비율은 6%에 그쳤다.

정치성향에 따라 과학에 대한 신뢰도 격차도 보였다. 갤럽은 민주당 지지자 중 79%가 과학을 신뢰한다고 답한 반면 공화당 지지자는 45%에 그쳤다고 분석했다. 퓨리서치센터가 2017년 조사한 결과 백인 복음주의자 중 22%가 어린이에게 홍역, 유행성이하선염(볼거리), 풍진 예방접종을 하는 데 반대하는 등 백신 불신의 뿌리가 깊었다.

정치성향과 종교, 과학에 대한 신뢰 문제가 얽히면서 백신 기피자의 태도를 바꾸기가 더욱 어려워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목사인 프랭클린 그레이엄은 지난 3월 백신 접종을 권장했다가 오히려 복음주의자로부터 역공을 당하기도 했다. 일부 공화당 소속 정치인은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백신 관련 음모론을 전파해 물의를 빚었다. 백신 접종 압박하는 기업하지만 백신 기피자가 계속 버티기는 어려운 상황이 왔다. 백신 접종에 대한 미국 기업의 태도가 급변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업은 백신 접종 의무화에 조심스러운 입장이었다. 백신을 맞은 근로자에게 현금 등 인센티브를 주겠다는 ‘당근’을 꺼낸 기업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근로자에게 백신 접종 압력을 넣는 경우가 급증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기업이 급작스럽게 당근을 줄이고 채찍을 꺼내들었다”고 했다.

미 기업은 백신 접종 의무화와 함께 사무실 복귀 시기를 잇따라 연기하고 있다. 소셜미디어 회사 페이스북은 직원의 사무실 복귀 시점을 내년 1월로 미룬다고 이날 발표했다. 앞서 페이스북은 직원에게 사무실 출근 전 백신을 맞으라는 지침을 내렸다. 같은 날 완구회사 해즈브로, 통신회사 AT&T 등도 비슷한 지침을 내놨다. 전날인 11일에는 맥도날드가 합류했다. 미국의 최대 고용주로 꼽히는 유통기업 월마트,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 등도 직원에게 백신 접종을 권고했다. 일부 기업은 협력업체 직원에게까지 백신 접종을 요구하고 있다.

기업이 사실상 접종 강제에 나섰다는 해석도 나온다. 건강 또는 종교적 이유가 있지 않는 한 백신을 맞지 않겠다는 근로자를 해고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백신 접종 여부가 일자리 유지 문제로 이어지면 백신 기피자 중 상당수가 마음을 돌릴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미 식품의약국(FDA)이 정식 사용 승인을 내린 백신이 나오면 안전성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겠지만 완강히 백신을 거부하는 강경파는 끝까지 미접종자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법원은 백신 기피자 편에 설 가능성이 낮다는 관측이다. 이미 1905년 미 연방대법원은 중요한 선례가 된 판결을 내놨다. 헤닝 제이콥슨 목사는 천연두 접종을 거부하는 성인에게 벌금 5달러를 부과하는 매사추세츠주 법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냈다. 존 마셜 할런 당시 연방대법관은 “사회는 구성원의 안전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며 “거대한 위험이 발생했을 때 개인의 자유는 제한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