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 현대미술가 구사마 야요이(92·사진)의 작품에는 수많은 단색조 점들이 찍혀 있다. 무한히 반복되는 망과 이를 구성하는 물방울무늬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눈이 어지러워진다. “기괴하고 징그럽다”며 질색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최근 국내 미술시장에서 그의 작품은 없어서 못 팔 만큼 인기다. 지난해 구사마 작품의 국내 경매 낙찰총액은 88억9500만원으로 이우환에 이어 2위에 올랐다. 대표 추상화가 김환기마저 제쳤다. 올 상반기에는 낙찰총액 121억873만원으로 지난해 연간 기록을 넘어섰다.
세계 미술시장에서도 구사마의 명성은 독보적이다. 미국의 미술전문매체 아트넷은 2019년 발표한 ‘지난 10년간 작품값이 가장 많이 상승한 작가 100명’ 목록에서 구사마를 3위에 올렸다. 세계 여성 아티스트 중 역대 경매 낙찰가 1위 기록(2014년 710만달러)도 그가 보유하고 있다. 2012년 루이비통과의 협업(컬래버레이션)을 시작으로 각계 명품 브랜드와 협업 상품을 연달아 출시하는 등 상업적인 이용도 활발하다.
구사마의 작품이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는 이유는 뭘까.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컬렉터들은 “작품에서 치유의 에너지가 느껴진다”고 입을 모은다. 구사마는 일본 동북부 마쓰모토의 농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어머니에게 극심한 육체적 학대를 받아 평생 착란과 편집증 등 정신질환을 앓았다. 1957년엔 홀로 뉴욕으로 건너가 성차별과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며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지만 정신질환이 악화돼 1973년 귀국해야 했다.
1977년부터는 도쿄에 있는 정신병원을 드나들며 수십년간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반복되는 고통과 절망에 좌절하는 대신 이를 자기 치유의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세계가 보는 이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는 게 애호가들의 설명이다.
그의 상징과도 같은 ‘물방울무늬’ 역시 정신질환의 산물이다. 구사마는 어릴 적 식탁보의 빨간 꽃무늬 패턴을 본 뒤 천장이나 창밖을 보면 그 잔상이 외부로 계속 확장돼 나타나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이 환영을 그대로 화폭에 옮긴 게 그의 작품이다. 기존의 회화적 관습에서 완전히 벗어나 잠재의식을 추상미학으로 승화한 구사마의 작품은 관객에게도 무한의 세계와 자유로운 해방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는 평가다. 반복되는 물방울무늬를 통해 안정감과 편안함, 관대함과 소박함을 떠올리게 된다는 것이다.
구사마의 작품은 MZ세대(밀레니엄+Z세대)에게 특히 인기가 많다. 지난 3월 열린 서울옥션 경매에서는 스타 인터넷 강사 현우진 씨(34)가 23억원에 ‘Infinity Nets(GKSG)’(2010)를 낙찰받아 화제가 됐다. 한 경매회사 관계자는 “작가의 높은 인지도와 인생 스토리, 누구든 한 번 보면 구사마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아볼 정도로 독자적인 양식 등이 MZ세대의 마음을 끄는 것으로 보인다”며 “단색조의 작품이 많아 인테리어에 활용하기도 좋다”고 말했다.
11일 서울 순화동 아트스페이스선에서 개막하는 소장자 특별전 ‘구사마 야요이: 오리엔탈의 빛’은 컬렉터들의 ‘구사마 사랑’을 실감할 수 있는 전시다. 이번 전시에는 국내 컬렉터들이 갖고 있는 작품 20여 점이 나왔다. 구사마의 대표작 중 하나인 ‘화이트 네트’(2006·사진)를 비롯해 호박 무늬를 다양하게 변주한 1990년대 스크린프린트 작품 10여 점, 2000년대 제작한 화병 등 정물을 소재로 한 판화 등을 만날 수 있다. 구사마의 작품세계를 소재로 한 김보미 노현영 이본 윤오현 등 국내 신진 작가 4명의 오마주 작품도 따로 선보인다. 전시는 내달 23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