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헌 전 금융감독원장이 지난 5월 퇴임한 지 석 달여 만에 결국 관료 출신으로 빈자리가 채워졌다. 정은보 신임 금감원장은 행정고시 28회로 공직에 입문해 금융위원회에서 금융정책국장, 부위원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고승범 금융위원장 후보자와는 행시 동기인 데다 금융위에서 오랫동안 한솥밥을 먹은 만큼 윤 전 원장 시절 각종 파열음이 적지 않았던 금융위·금감원 간 관계가 앞으로 정상화될 것이란 기대가 크다. 고 후보자는 청문회준비팀으로 첫 출근하면서 “금융위와 금감원은 한몸처럼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원장도 취임사에서 윤 전 원장과 차별화하겠다는 각오를 드러냈다. 정 원장은 ‘법과 원칙에 기반한 금융감독’을 첫손에 꼽았다. 그러면서 “내용적 측면만 아니라 절차적 측면에서도 법적 안정성과 신뢰 보호에 기초한 금융감독이 돼야 한다”고 했다. 윤 전 원장이 금융소비자 보호 등을 내세워 특정 금융회사에 대해 거의 ‘먼지털기식’ 검사를 벌였던 것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정 원장은 또 사후적 제재보다 사전적 감독을 강화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겠다고 했다. 이 역시 윤 전 원장이 파생결합펀드(DLF)나 라임·옵티머스 사태를 미리 막지 못했으며 사후에 이에 대한 책임도 해당 금융사 및 최고경영자(CEO)들에게 물어 일제히 중징계를 내린 뒤 오히려 행정소송까지 당한 뼈아픈 수모를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정 원장 취임사의 백미는 바로 공자를 인용한 구절이었다. 윤 전 원장은 이임사를 통해 논어 자로편에 나오는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라는 문구를 인용한 바 있다. 화이부동이란 뜻을 함께하지 않더라도 화목할 수 있는 군자의 덕목을, 동이불화는 마치 뜻을 함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화목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물론 윤 전 원장 스스로도 소통과 화합에 실패한 탓에 이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제시한 키워드였지만 정 원장은 이를 ‘군자불기(君子不器)’로 맞받았다.
군자불기는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말로, 크기가 한정돼 일정한 양밖에 담을 수 없는 그릇과 달리 군자는 쓰임새와 크기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의미다. 정 원장은 취임사에서 “모든 분야의 일을 유연하게 처리하고 적응할 수 있음을 일컫는 말”이라며 “법과 원칙을 따르되 시장과 호흡하며 경직되지 않게 감독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참고가 될 만한 덕목”이라고 말했다. 금융계는 정 원장의 이 같은 발언이 ‘립서비스’에 그치지 않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