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산 써라" 압박에…日, 美 투자 40% 급증

입력 2021-08-04 17:15
수정 2021-08-05 01:25
일본 기업들이 올해 들어 미국 투자를 대폭 늘리고 있다. 세계 산업계를 주도하는 시장을 선점하면서 지정학적 위험에도 대비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4일 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올 1분기 일본 기업의 미국 직접투자 규모는 2조6402억엔(약 27조6820억원)으로 전체 해외 직접투자(5조8980억엔)의 45%에 달했다. 전체 해외 투자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4% 늘어난 가운데 미국 투자 규모는 40% 급증했다.

일본 기업의 미국 투자는 직전 분기인 2020년 4분기(8730억엔)에 비해 세 배 이상으로 늘었다. 중국 투자 규모는 45% 감소한 1840억엔에 그쳐 미국 쏠림 현상이 뚜렷했다.

일본 기업들이 미국으로 몰려가는 것은 코로나19 충격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회복되는 시장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올해 미국 경제성장률을 6.9%로 예상했다. 각각 2.6%와 4.3%인 일본과 유럽연합(EU)은 물론 세계 전체 평균(5.8%)도 웃돈다.

경기 회복으로 내구소비재 판매가 급증하자 미국에 공장을 건설해 현지 수요에 대응하는 전략을 펴고 있다는 설명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최근 2조달러(약 2289조원) 규모의 초대형 인프라 투자 계획을 발표해 관련 수요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미쓰비시케미컬이 1000억엔을 들여 미국 루이지애나주에 생산공장을 짓기로 한 것도 아크릴수지 원료인 MMA 수요 급증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는 분석이다. MMA는 자동차 램프와 간판, 주택용 페인트 등 폭넓은 영역에서 사용되는 내구소비재다.

미쓰비시케미컬은 2025년부터 루이지애나 공장에서 연간 35만t의 MMA를 생산할 계획이다. 세계 전체 수요의 10%에 해당하는 규모다. 이 회사의 MMA 생산 능력은 20%가량 늘어난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연방정부의 미국 제품 우선 구매 정책인 바이아메리칸법을 더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도 미국 투자를 늘리는 배경으로 꼽힌다. 강화된 법에 따르면 미국산 제품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현재 55%인 미국산 부품 사용 비율을 2029년까지 75% 이상으로 높여야 한다.

자국을 중시하는 미국의 산업 전략은 정권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중국과 치열한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히가시하라 도시아키 히타치 회장이 “현지 생산을 통해 지정학적 위험을 낮춘다”는 방침을 밝힌 것도 이런 맥락으로 해석된다. 히타치는 미 워싱턴수도권교통국에 지하철 차량을 납품하기 위해 워싱턴DC 인근에 철도차량 공장 세 곳을 건설하고 있다.

일본 기업이 생산시설을 해외로 이전하면서 엔저(円低)가 기업 실적을 개선시키고 경제를 성장시킨다는 오랜 믿음도 깨지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계열 경제연구소인 일본경제연구센터는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10엔 떨어지면 국내총생산(GDP)이 0.5% 감소한다는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수출 가격 상승에 의한 수익성 개선보다 수입 가격 인상에 따른 비용 부담이 더 크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생산 시설의 해외 이전으로 수출 의존도가 낮아진 데다 매년 17조엔(약 179조원)어치의 화석연료를 수입하는 산업 구조도 일본의 무역수지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탈석탄 사회에 진입해 산업구조가 크게 바뀌는 2050년에도 엔화 가치가 10% 하락하면 경제성장률이 0.4% 낮아질 것으로 전망됐다. 탈석탄화로 화석연료 수입량이 80% 감소하지만 정보기술(IT) 등 다른 부문의 수입 물량이 늘어나면서 부담이 여전할 것이란 분석이다.

고바야시 다쓰오 일본경제연구센터 수석연구원은 “디지털화가 늦은 탓에 해외 소프트웨어와 클라우드, IT 기기의 수입량이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