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전당인 대학에서 일해왔고, 가톨릭교회의 수도자로서 성직에 종사하는 사제라는 이력 때문인지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꼭 철학적인 질문이 아니라도 사람은 누구나 ‘참다움’에 대한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진짜로?’ ‘정말로?’ 일상 대화에서 흔히 쓰는 말이다. 부지불식간에 자연스럽게 참다움을 좇는 표현이 우리 일상의 언어에 많다. 예리함, 도도함, 혹은 굳건함 등의 형용사가 보통 진리의 이미지를 따라다닌다. 따지고 보면 우리 인간의 역사에서 얼마나 많이 진리라는 명분으로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며, 상처를 주고 때로는 죽음에 이르게까지 했는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종교 갈등의 대부분은 그 명분에서 서로 자신이 ‘진리’라고 고집하며 타 종교 안에 깃든 진리성을 부인하기 때문은 아닐까?
서강대 정문을 들어서면 알바트로스탑이라는 상징물이 있다. 뾰족하게 우뚝 솟아 있는 탑, 그리고 가운데 줄기를 따라 은빛 철재로 된 두꺼운 창이 바닥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바닥엔 방패 모양의 교표에 ‘OBEDIRE VERITATI(진리에 순종하라)’라는 표어가 적혀 있다. 역시 진리의 표상으로서 도도함이나 예리함 혹은 강인함이라는 진리의 표상이 반영돼 있다. 스스로 질문해 본다. 왜 진리의 표상은 늘 뾰족해야만 할까. 혹시 둥글둥글하거나 보자기처럼 유연성 있는 포용력의 이미지로 진리를 표상할 수는 없는 것일까.
‘진리에 순종하라’는 표어는 물론 그리스도교 성경에서 발원된 표현이다.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나는 진리를 증언하러 왔다”고 하셨기에 모든 이가 진리, 즉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야 한다는 요구가 암묵적으로 담겨 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고, 또 어떤 이는 남을 짓밟고 착취하는 데 진리라는 명분을 이용하고, 또 어떤 이는 진리는 그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그러면서도 남을 향해선 자신이 의식하건 안 하건 날카로운 진리의 잣대를 들이댄다.
그런데 다른 종교에서는 진리를 둥글고 너그럽게 표현하고 있다. 뾰족해서 옆에 있으면 혹시 찔릴까 두려운 날카로운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둥글둥글 유연하고 모나지 않은 그런 편안한 모습이어야 하지는 않을까? 대리석처럼 단단하고 매끈해서 부딪히면 깨지거나 흠집이 나는 그런 모양이 아니라 부딪혀도 부드럽게 감싸 안아 모든 파괴적인 힘을 단번에 없애주는 보자기 같은, 누구나 편하게 어떤 모양도 감싸줄 수 있는 그런 융통성 있는 모습은 아닐까 그려본다. 한없이 경직돼 가고 틀에 갇혀 규격화되는 우리 시대와 사회 안에서 둥글둥글하기도 하고 보자기처럼 평평하고 융통성 있는 진리의 표상이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다. 진리는 보자기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