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익숙한 곳을 벗어나려는 욕망 때문일까,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 때문일까. 스스로 던진 이런 우문의 답은 항상 ‘둘 다’였다.
익숙한 곳을 벗어나야만 새로움을 만날 수 있고, 익숙한 곳을 벗어나고 싶어 떠나면 새로움을 만나기 마련이다.
어느 날 문득 여행을 추억하다가 장롱 속의 낡은 여권을 꺼내 그동안 방문한 나라의 도장이 몇 개인지 헤아려 봤다. 선명히 찍힌 도장에 왜 그리 추억이 많은지…. 회사 업무 때문에 혹은 여행으로 찍힌 도장들 사이사이로 영화처럼 추억이 펼쳐졌다.
1986년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해외연수를 다녀온 기억 그리고 독일에서 지점 근무를 했을 때의 기억이 가장 그리운 시간으로 남아 있다. 연수 때는 연수생들과 함께 유레일패스를 끊어서 다녔다. 지점 근무 당시엔 직접 자동차를 끌고 유럽 곳곳을 누볐는데 프레디 머큐리가 사랑하고 찰리 채플린이 머물렀던 아름다운 레반 호수가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1990년 독일 통일 전에는 서베를린을 가기 위해 자동차로 동독 영토를 지나서 들어갔다. 당시 두 살, 다섯 살인 어린 자녀들을 태우고 하루에 400~500㎞를 달렸다. 고등학교 시절 이탈리아 소렌토 하면 유명했던 노래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따라가 보기도 했다. 이 모든 추억이 일기장을 넘기듯 머릿속에 남아 있다.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빈·잘츠부르크, 스위스,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등 다양한 나라의 오래된 역사와 앞선 문화를 만끽하면서 소박하게나마 꿈꿨던 것은 나중에 조직의 리더가 된다면 회사에서 지원해서라도 직원들에게 같은 경험을 만끽하게 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세상의 깊고 넓은 역사를 직접 경험함으로써 미래지향적이고 긍정적이고 의욕적인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과거처럼 직원들이 삼삼오오 함께 해외 곳곳을 다니다 보면 연대의식을 제고하게 되고 고국인 한국에 대한 자부심도 생길 것이다. 하지만 막상 꿈을 실천하려고 하니 코로나19라는 벽이 가로막았다.
35년 전 기억이 요즘 들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고 그리움이 피어오르는 것은 팬데믹으로 인한 아쉬움이 크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가장 먼저 포기한 건 여행이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날들이 벌써 2년째.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다.
희망이 없으면 인류는 발전하지 못한다. 사방이 벽으로 막힌 감옥에서도 희망의 꽃은 핀다. 현재의 어려움을 다같이 이겨내 서로 환한 미소로 마주하며 손과 손을 맞잡고 악수하던 일상을 되찾아 다시 꿈꾸고 희망을 이야기할 그날을 고대해 본다. 사무치게 오래된 추억과 기억들이 고스란히 담긴 여권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장롱 속에 넣으며 가슴속으로 조용히 외쳐 본다. “그날은 꼭 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