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불균등하게 흐른다. 개인뿐 아니라 국가와 민족, 지역에 따라서도 그렇다. 지나간 세월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모두가 다를 수밖에 없다. 특히 격동의 20세기를 다루는 데 있어 동양과 서양의 시선이 같을 수는 없다. 동양 사회가 서구보다 더 격렬하고 압축적으로 시대의 변화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같은 동양이라 하더라도 한국과 중국, 일본의 시대 인식은 차이가 작지 않다.
《단기 20세기》는 중국 칭화대 교수로 현대 중국 사상계를 이끌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저자가 2000년부터 2018년까지 ‘20세기 중국’을 주제로 집필한 각종 논문과 강연 원고 등을 모은 책이다. 1000여 쪽의 방대한 분량에 ‘20세기’와 ‘중국’을 현대 중국인의 시선으로 다뤘다.
책의 주제인 ‘20세기’에 대한 정의부터 유별나다. 저자는 신해혁명이 발발한 1911년부터 문화대혁명이 끝나는 1976년까지를 20세기로 보는 ‘단기 20세기론’을 주장한다. 서구의 시간 기준으로는 중국사회의 특수성을 제대로 간파할 수 없기에 동양 사회에 적합한 독자적인 ‘시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20세기라는 시대 규정은 중국인에겐 낯선 이물질 같은 것이었다. 1907년을 ‘정미년’ 혹은 ‘청 광서제 30년’으로 다루던 세계에 시간을 기계적으로 100년 단위로 나눈다는 인식이 들어올 틈은 없었다. 제국주의의 물결에 중국이 휩쓸리기 전까지 중국인은 세기를 논하지 않았고, 세기를 통해 시대를 규정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중국인들이 원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20세기라는 기준으로 시대를 바라보게 된 것은 중국 사회를 철저하게 바꾼 원동력이 됐다. 굴욕적인 아편전쟁과 청일전쟁, 의화단 운동의 혼란과 무술변법의 실패 등이 중첩된 19세기는 중국인에게 변화의 시기라기보단 쇠락과 혼돈의 시대였다.
그에 대한 반작용 격인 20세기에 ‘진정한 변화’가 중국인들에게 일어났다. 여성은 전족을 거부했고, 남성은 변발을 잘랐다. 스스로 혼인을 결정하고 가정 구조가 변했다. 사람들은 더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서 이상적 정치의 근원을 찾았고, 성인의 언행 대신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다른 나라의 사건에서 현실의 교훈을 탐구했다.
여기에 신해혁명으로 아시아 첫 공화국이 건설됐고, 이란과 터키 혁명에 영감을 주는 등 ‘아시아의 각성’을 이끌었다는 식의 자기 위안적 역사 해석도 가능해졌다. 양차 세계대전과 현실 사회주의의 등장과 몰락, 세계화 같은 서구의 기준 말고 중국에 적합한 ‘세기론’의 필요성이 제기된 이유다.
동시에 세계사적인 의미를 지닌 보편적 변화가 중국을 배경으로 이뤄졌다. 중국이란 공간에서 제국주의가 지배한 근대 세계 질서와 동서 냉전, 신자유주의적 움직임이 작동했다. 중국은 자신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기 위해 분투했고, 어느 정도 시대의 조류를 주도하기도 했다. “국가는 독립해야 하고, 민족은 해방돼야 하며, 인민은 혁명을 해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주장은 반향이 적잖았다.
이 같은 중국의 독특한 역사 경험은 이후 중국이 나아갈 방향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수많은 중국 붕괴론이 등장했지만 정작 붕괴한 것은 중국이 아니라 허다한 ‘붕괴론’들이었다. 자기 갱신을 하려는 의식이 강하고 자주성이 강한 중국 국가의 성격, 문화대혁명 기간 사회 하층을 경험했던 지도층이 기층 사회의 요구에 유연하게 반응한 점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다만 서구 중심적 ‘단기 20세기론’을 주장한 에릭 홉스봄과 자유민주주의로의 ‘역사의 종언’을 언급한 프랜시스 후쿠야마를 다분히 의식한 저자의 분석은 지나치게 중국에 초점을 맞춘 탓에 보편적인 시대 구분 대안으로 자리 잡기엔 부족하다는 인상이다. 책 곳곳에서 △사상과 언론의 자유가 제약된 중국 사회의 현실 △6·25전쟁처럼 한·중이 얽힌 근·현대사 주요 사건에 대한 일방적인 중국 측 해석 △비판적 지식인조차 자유롭지 못한 중국 중심주의를 수시로 마주하는 것도 불편한 점이다.
톈안먼 사태를 ‘1989년 사회운동’이라고 두루뭉술하게 칭한다든지 갑오전쟁(청일전쟁), 3·14 티베트 사건(2008년 티베트 유혈 사건)처럼 낯선 중국식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 점도 아쉽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