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백신 원정

입력 2021-07-28 17:29
수정 2021-08-23 09:55
“애들 방학 맞아 뉴욕 가서 백신 무료 접종하고 왔다.” “4박5일간 괌에서 ‘백신 휴가’를 보냈다.” 백신이 남아도는 미국에서 원하는 종류의 백신을 골라 맞고 여행까지 즐기는 ‘백신 원정’이 인기를 끌고 있다. 출장이나 여행길에 별도 예약 없이 무료 백신을 접종하고 관광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여행사들이 내놓은 ‘백신 관광’ 패키지 상품에는 언제 백신을 맞을지 모르는 사람들의 문의가 몰리고 있다. 1회용 얀센 백신을 포함한 9박12일 상품은 900만원, 2회까지 접종해야 하는 화이자·모더나의 4주짜리 장기체류형은 1500만원 선이다. 귀국 후 2주간 자가격리를 해야 하는데도 수요가 계속 늘고 있다.

미국행 ‘백신 원정’은 다른 나라에서도 성행하고 있다. 지난해 말 인도에서 시작돼 올해 멕시코, 태국, 일본, 대만 등으로 확산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자가격리 의무도 없다. 괌은 전 세계를 상대로 ‘백신 관광’ 광고까지 내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의 배경을 미국의 ‘백신 파워’에서 찾는다. 미국은 우리나라보다 코로나 발병이 늦었는데도 백신 개발에는 앞섰다. 정부가 모더나에 25억달러, 화이자에 19억달러 등 180억달러(약 20조원)를 선(先)지급하며 연구개발을 도왔다. 타국 제약사에도 거액을 지원했다. 그 덕에 전 국민이 내년까지 맞고도 남을 백신을 확보했다.

한국의 올해 백신개발 예산은 686억원에 불과하다. 5개 업체가 백신을 개발 중이지만 언제 나올지 모른다. 해외 백신이라도 충분히 구해와야 하는데, 지금까지 백신 구입비를 다 합쳐봐야 5조원밖에 안 된다. 백신이 모자라니 방역지침만 강화되고, 자영업자의 생계는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다.

그동안 정부가 뿌린 재난지원금만 50조9000억원이다. 이번 5차 지원금 34조9000억원까지 합하면 85조8000억원에 이른다. 이 돈의 10%만 백신 구입에 썼더라면 지금의 ‘백신 대란’을 줄일 수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나친 공포심리도 문제다. 델타 변이 출현 후 확진자가 늘어난 것과 반대로 사망자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의 코로나 현황판에 따르면 이달 치사율은 올 1월에 비해 영국은 약 10분의 1, 한국은 14분의 1로 낮아졌다. 그런데도 전 국민이 ‘백신 노이로제’에 시달리고 있으니 너도나도 국경을 넘는 ‘백신 엑소더스’ 행렬을 탓할 수만도 없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