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적으로는, 이론적으로는 도로부터 잘 만들어놓고 자동차를 만드는 게 맞다. 도로 뿐 아니라 교통 신호체계, 각종 안전장치와 관련 교육, 보험, 기왕이면 손해 사정인 제도까지 갖춰놓고 자동차를 만들어냈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의 순서는 반대다. 자동차의 출현, 발달, 보급 확대에 따라가며 도로가 생겼다. 차량에 대한 재산권 행사나 세금 문제까지 그 뒤에 생겼다. 100년쯤 지나자 보편적 자동차 문화가 형성되면서 전 세계적 표준도 자연스레 생겼다.
이런 현상이 ‘문화지체(cultural lag)’라는 개념이다. 비물질문화가 물질문화의 빠른 변동을 따라가지 못하며 뒤처지는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이었다. 블록체인 기술의 확대 및 그와 관련된 논쟁, 법적·제도적 뒷받침 움직임을 보면 문화지체 현상이 확인된다. 비물질문화와 물질문화를 IT·AI 기반의 신기술과 다각도로 움직이는 법·행정으로 대치해보면 비슷한 양상이다.
암호화폐는 온갖 논란과 시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짧은 시일 내에 ‘사회적 실체’'경제적 실체'로 인정을 받는 분위기다. 물론 아직 거품 논쟁은 여전하고, 제도권·기득권의 총체적 공격은 지속되지만, 그런 현상이 역설적으로 존재를 인정하는 측면이 강하다.꿈틀대는 '가상자산업', 자리잡기 위한 전제·요건이런 논쟁을 거쳐 큰 이슈로 부각된 것이 ‘가상자산’ ‘가상자산업’이다. 암호화폐가 그냥 자산이 아니라 일단 ‘가상’의 자산이 된 것부터가 흥미로운 대목이다. 가상의 자산도 자산이라면, 사회적 규범으로 정비될 게 많다. 일차적으로 가장자산에 대한 법적 규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 기반에서 자산의 거래, 즉 양도와 양수에 대한 사회적 질서·보증·보호·안전도 필요하다. 그 다음 수순은 그에 따른 과세, 증여·상속 등에서의 적용 방식일 것이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검은 자금의 배제, 범죄적 행위의 차단도 필수다.
그런 논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2021년 3월 ‘특정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의 개정은 주요한 계기였다. 2019년 국제자금세탁 방지기구(FATF)의 권고도 한국을 그런 쪽으로 움직이게 한 요인이었다.
가상자산은 어떻게 자리잡아갈까. 암호화폐는 어떤 것이 인정을 받고, 어떤 곳(거래소)에서라야 안전하고 용이하게 사고파는 행위가 가능할까. 블록체인 기반의 기술은 날로 발전하고 있는 데 제도는 여전히 미흡하다. 일종의 문화지체 현상이 목도되고 있다. ‘디파이(탈중앙화 금융)’ ‘NFT(대체불가토큰)’ ‘메타버스(가상현실세계)’ 등의 기술적 진보는 이미 놀라울 정도다. 근본적 우려는 뒤늦게 발동 걸린 정부와 국회의 제도적 보완이 무서운 신 규제가 되면서 신기술의 성장·발전을 가로막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거래소의 설립 요건, 승인·허가 여부·조건이 현안 관심사이런 문제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전문가 포럼의 내용을 전한다.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내용이 많아 일반 독자가 이해하기에는 애로도 있을 수 있을 만하다. 이른바 ‘코인 투자’ 좀 한다는 이 분야 ‘활동가’들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다만 가상자산이라는 게 어떻게 사회적 자리를 잡아갈 것인지, 지금의 쟁점이 무엇인지 큰 흐름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 될 수 있을 것이다.
가상자산 이슈를 논의해온 ‘블록체인포럼’(회장 김기흥 경기대 명예교수)의 20일 밤 비대면 정책 세미나는 그런 점에서 관심 가져볼 만한 토론회였다. ‘다가오는 가상자산업 신고와 인가 쟁점 세미나’라는 제목 그대로 거래소의 자격, 신고 혹은 승인 제도, 책임 문제 등이 논쟁점이었다. 전문 분야여서 블록체인 산업 종사자와 가상자산에 대한 법적 문제에 관심이 있는 독자를 위해 주요 발표 요지를 그대로 전한다. 특금법 자체가 아직은 변동성이 큰데다, 난립한 국내의 가상자산 거래소 가운데 과연 몇 군데가 살아남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어서 많은 부분이 아직은 유동적인 것도 사실이다.
▶정지열 한국 자금세탁방지 전문가 협회장 = “우체국을 통한 가장계좌 개설 허용방안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우체국은 FATF와 미국의 규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데다, 블록체인 발전과 진흥을 담당하는 과기부 산하에 있기 때문이다. 과잉규제 간소화 노력도 중요하다. 가상자산사업자들은 (정부 규제에 맞서) 시간끌기 전략을 하면서, 원화 시장은 포기하고 코인마켓만 운영하는 전략에서, 해외로 사업을 옮기는 전략으로 나갈 것으로 예상 된다”
▶한서희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 = “가상자산사업자에 대해 56개의 세부점검 항목이 존재한다. 항목 심사 때 인증심사 기관마다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문제가 생기고 있고, 심사과정에서 고압적 태도도 문제가 된다. 인증심사 기준 자체가 거래소 기준으로 설정돼 있어 거래소가 아닌 사업자에 대한 별도 기준도 필요하다. 은행의 실명확인 입출금 계정 문제에서는 금융회사가 실명확인 계정 발급 책임을 지게 돼 있어 발급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위험평가를 제대로 이행했다면 가상자산사업자 거래에서 발생된 자금세탁 행위에 대한 면책규정이 필요하다"
▶도현수 프로비트 거래소 대표 = “실명확인 계좌가 거래소 신고요건에 포함돼 있어 은행들 부담이 크다. 그 결과 기존의 4개 거래소 외 후발 거래소들은 제대로 심사받을 기회조차 없는 상황이고, 이대로 가면 4개 업체 외 전부가 폐업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그래도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앞으로도 철저한 심사와 검사를 계획하고 있다. 결국 실명확인계좌를 받지 못하면 가상자산 간 교환만 할 수 있도록 신고제도로 변경을 제안 한다”
▶노태석 법무법인 태평양 전문위원 = “실명확인 입출금계정 발급 문제는 은행의 재량에 따라 가상자산 사업자의 사업지속 여부가 결정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업자 입장에서는 부당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은행입장에서도 사업자에 대한 신뢰관계 형성이 어려우므로 실명확인 입출금계절 발급을 강요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거래질서의 투명성과 공정성 확보로 시장의 신뢰 구축이 필요하다. 감독당국도 은행이 실명확인 재량권을 남용 않도록 하면서 선의의 투자자가 생기지 않도록 관리감독을 해야 한다”"수준 높은 원화마켓 거래소 자유롭게 나오게 해야"▶김기흥 회장 = “거래소 인증제를 만들어 인가 수준의 원화마켓 거래소가 자유롭게 나오는 게 좋다. 대신 명확한 인가제로 수준 높은 거래소가 자유롭게 나오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 밖의 거래소는 ISO 같은 등급을 부여해 소비자가 선택하게 하면 된다. 지금 문제점은 허가제도 아니면서 허가제처럼 운용하는 게 문제다. 금융위와 FIU가 거래 토큰을 유형별로 분류해 가상자산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김정혁 서울사이버대 교수 =“그동안 암호화폐거래소 설립 및 운영은 당국의 규제 사각지대에 놓여 무분별한 난립과 불명의 코인 상장, 과다한 수수료 수입, 소비자 보호 외면 등의 문제점을 낳았다. 신고 현안과 주요 요건 사항 외에도 강력한 내부통제와 소비자 보호 대책이 있어야 한다. 가상자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거래소 인가제를 통해 제도권 내에서 다양한 비즈니스와 금융상품 발굴이 필요하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