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독일 홉 회사가 8代를 이어온 비결

입력 2021-07-21 17:38
수정 2021-07-22 00:14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잘 관리하고 더 좋은 것으로 만들어 후손에게 전한다.’

독일 뉘른베르크에 있는 기업 바스&손(Barth&Sohn)의 본사 1층 로비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1794년 설립된 이 기업은 맥주의 천연 원료인 홉(hop)을 생산한다. 227년의 세월을 거쳐 8대째 이어진 장수기업으로 세계 홉 시장 점유율 30%를 장악하고 있다. 1899년 설립된 바이오 이유식 제조사 힙(HiPP)도 유럽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는 강소기업이다.

창업 후 200년이 넘는 장수기업은 독일에 1800개가 넘는다. 세계적인 명품에 쓰이는 단추를 만드는 프륌(Prym)의 설립연도는 1530년이다. 무려 500년에 가까운 기간이다. 모두 제조업 강국 독일이 자랑하는 ‘히든챔피언’이자 ‘미텔슈탄트(Mittelstand·중소기업)’다. 엄격한 기업 승계문화독일의 미텔슈탄트들이 세계 시장을 무대로 오랜 기간 생존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 엄격한 승계 기준과 상생 문화다. 바스&손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선 외국어를 네 개 이상 구사해야 한다. 대학에선 반드시 생산과 관련된 엔지니어링 분야는 물론 경영학을 공부해야 한다. 힙의 후계자는 어려서부터 회사 아르바이트, 인턴 등을 거치며 기업문화를 익혀야 한다. 종업원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면 승계가 어렵다. 운전기사에게 폭언을 일삼는 품성의 후계자는 기업을 경영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장기근속자를 우대하고 협력업체의 성장을 돕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3~4대에 걸쳐 일하는 근로자가 흔할 정도다. 요즘 유행하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도 따지고 보면 이해관계자(stakeholder) 중심 자본주의에 바탕을 둔 독일식 기업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기업승계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도 한국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일단 ‘부(富)의 대물림’이라는 인식 자체가 강하지 않다. 독일의 연방헌법재판소는 2014년 ‘기업승계 과정에서 수반되는 기업의 사업재산에 대해 상속세를 감면하는 것은 기업의 존속을 보장하고 일자리 보전이라는 공공복리 증진에 기여한다’고 규정했다. 일반인이 부동산 등을 물려주는 것과 기업인이 후계자에게 기업의 자산을 승계하는 건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본 것이다. 직계비속 기준 독일의 기업 상속 최고세율(30%)이 한국(60%)보다 적은 건 이런 관점의 차이가 작용하고 있다. '부의 대물림' 인식 탈피해야한국의 중소기업은 산업화가 본격화된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집중적으로 설립됐다. 창업세대의 상당수가 70대 안팎이다. 승계를 더 늦추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과도한 상속세 부담과 엄격한 상속 공제 요건에 애를 먹고 있다. 사실상 은퇴가 막힌 창업주와 2세가 함께 늙어가는 ‘노노(老老) 상속’ 문제는 중소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급부상하고 있다.

원활한 기업승계가 중요한 이유는 한국 경제가 고용(83.1%)이나 매출(48.5%) 등 중소기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국내 제조업체 수의 99.7%를 차지하는 중소 제조업의 중요성은 말할 나위가 없다. 제조업 경쟁력은 곧 국가의 경쟁력이기도 하다. 유로존을 위기에 빠뜨린 그리스의 제조업 비중은 10% 수준에 불과했다.

기업승계가 끊기면 창업세대가 수십 년간 쌓아온 고유의 ‘암묵지(暗默知)’도 사장될 수밖에 없다. 500~600t의 항공기 무게를 견디는 착륙장치(랜딩기어)를 만들 수 있는 건 포스코 같은 철강회사가 아니라 정밀한 담금질 기술을 체득해 무른 쇠를 10배에서 100배 강하게 만드는 중소기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