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가 사상 처음으로 여성에게 남성 보호자 없이도 종교행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사우디는 그동안 종교적 이유로 여성이 운전·여행 등 사회활동을 하려면 남성 보호자와 동행하도록 했지만, 최근 3년새 이같은 제한을 없애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남성 보호자(마흐람·남편, 형제, 아들, 친인척 남자) 없이 이슬람 최대 종교행사인 정기 성지순례(하지)를 방문하려는 사우디 여성들이 급증했다"고 보도했다. 사우디는 지난달 처음으로 여성들에게 마흐람 없이 하지를 할 수 있도록 허용했는데, 여성들의 하지 신청이 쇄도한 것이다.
사우디 메카와 메디나를 방문하는 정기 성지순례는 하루 다섯 차례 기도, 라마단 금식 등과 함께 무슬림의 5대 의무 가운데 하나다. 특히 하지는 이슬람 신도들에게 평생 한 번 이상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의무다. 코로나19가 발발하기 전에는 해마다 전세계에서 200만명씩 메카로 몰렸지만, 올해는 지난해에 이어 코로나19 감염 우려를 이유로 허용 인원을 6만명으로 제한했다.
사우디 여성 리나 모크타르는 정부가 여성들에게 단독으로 하지를 허용해준 것에 대해 "놀랐지만 정말 반가운 일"이라며 환영했다. 그는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나를 하지로 데려가달라'고 부탁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면서 "이제 우리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올해 코로나19로 인한 인원 제한 때문에 나와 내 여성 지인들의 하지 신청서 대부분이 받아들여지지는 못했지만, 하지 신청 여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는 반가운 변화"라고 강조했다.
WSJ는 마흐람 조건 폐지 결정은 최근 사우디가 여성에 대한 제한을 일부 완화하려는 움직임의 일환이라고 분석했다. 전세계 많은 운동가들과 인권단체가 "마흐람 조건이 사우디 여성들을 2등 국민으로 전락시키고 있다"고 비판하자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사우디에서는 여성의 운전이 금지됐었다. 남성 동반자 없이 여행을 해서도 안됐고, 카페나 식당 등에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사우디의 카페나 식당 등은 싱글섹션(남성만 출입가능)과 패밀리섹션(남성 보호자를 동반한 여성 손님 출입 가능)으로 구역이 나뉘어져 운영됐다.
그러다 2015년 사우디 여성에게 처음으로 참정권을 허용한 게 여권 신장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는 시발점이 됐다. 사우디는 왕정국가지만, 지방선거를 통해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지방의원을 선출해왔다. 그동안 여성의 지방선거 참정권이 제한됐다가 2015년 처음 빗장이 풀렸다.
이후 2018년 여성에게 운전을 허용하고, 2019년엔 21세 이상 여성이 남성 없이 해외여행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같은 해 식당, 카페 등의 성별 분리 규정도 폐지했다. 다만 공식적인 개선 방침에도 불구하고 실제 현장은 들쭉날쭉한 기준 탓에 혼선을 빚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순례자들은 통상 종교청 산하 하지 전문 여행사를 통해 성지순례를 신청하는데, 여행사별로 마흐람 조항이 아직 남아 있는 곳들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마흐람과 동행토록 하는 것은 종교적 신념과 관습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실생활에서 많은 사우디인들이 변화를 즉각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또 다른 사우디 여성 두니아 모함마드는 "하지 신청은 받아들여졌지만, 처음에 여행사로부터 마흐람 없이는 참석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면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라고 전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