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막기 위해 네덜란드 ASML이 첨단 반도체 장비를 중국에 수출하지 못하도록 틀어막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ASML은 첨단 반도체 생산에 없어선 안 될 차세대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생산하는 세계 유일 업체다. 중국도 이 장비 수입에 눈독을 들이고 있지만 미국이 이를 가로막고 나선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바이든 행정부가 국가 안보를 이유로 네덜란드 정부에 ASML이 생산하는 극자외선 노광장비의 중국 수출 금지를 요구하고 있다고 미 당국자들을 인용해 1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그 결과 이 장비는 지금껏 중국으로 단 한 대도 수출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WSJ에 따르면 중국은 이 장비를 수입하기 위해 네덜란드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과거 네덜란드 주재 중국대사가 현지 언론을 통해 ASML 장비의 중국 수출이 허가되지 않으면 양국 무역관계가 훼손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바이든 행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이 장비의 중국 수출 제한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바이든 대통령 취임 후 한 달도 안 돼 네덜란드 측 카운터파트와의 통화에서 양국의 ‘긴밀한 선진기술 협력’을 강조하며 이 문제를 거론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이 ASML 장비의 중국 수출을 제한한 것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때부터였다. 미·중 갈등이 격화하는 가운데 중국이 ‘중국 제조 2025’ 정책을 통해 반도체산업 육성에 힘을 쏟자 미국이 이를 견제하고 나선 것이다. 2019년 당시 찰스 쿠퍼먼 백악관 국가안보부보좌관은 네덜란드 외교관들을 백악관에 초청해 “좋은 동맹은 이런 장비를 중국에 팔지 않는다”며 수출 제한을 요구했다. ASML이 만든 장비에 미국 부품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이런 부품의 네덜란드 수출 금지 가능성을 거론하기도 했다.
ASML은 반도체 노광장비 시장의 85%를 장악하고 있는 절대 강자다. 특히 차세대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100% 독점 생산하고 있다. 이 장비는 웨이퍼(반도체 기판)에 5나노미터(㎚) 이하의 미세회로를 새겨넣을 수 있다. 인텔, 삼성전자, TSMC 등 세계적 반도체 기업들도 첨단 반도체 생산을 위해선 이 장비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한 대에 1억5000만달러(약 1700억원)에 달하는 이 장비는 없어서 못 팔 정도다.
중국도 반도체산업을 키우기 위해 극자외선 노광장비 구입에 혈안이 돼 있다. 중국은 지난해 ASML 매출의 17%를 차지할 만큼 ‘큰손’이지만 중국이 사들인 장비는 모두 구식 모델이다. 극자외선 노광장비는 중국으로 단 한 대도 선적되지 않았다. WSJ는 “중국이 (장비를 독자 개발하려고 해도) ASML의 기술력에 비해 최소 10년 이상 뒤처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ASML 장비의 수출 제한이 미·중 기술냉전에서 중국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 16일 자국 기업들에 홍콩에서의 사업 위험을 알리는 경보를 발령했다. 홍콩에선 기업들이 영장 없이 전자기기를 통해 감시받거나 당국에 기업 및 고객 자료를 제출해야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 홍콩 인권 탄압을 이유로 홍콩 주재 중국 관리 7명을 제재 명단에 올렸다. 지난 13일 신장 지역에서의 사업 위험을 경고한 지 사흘 만이다.
이에 대해 중국 외교부는 17일 홈페이지를 통해 “미국의 제재는 기껏해야 휴지 조각일 뿐”이라며 “어떤 외세든 홍콩 사무에 관여하려는 것은 왕개미가 큰 나무를 흔들어 움직이려고 하는 것으로, 주제 파악을 못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중국 외교부 홍콩사무소도 “단호히 반격할 것”이라고 반발했다.
워싱턴=주용석 특파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