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옆 팀 업무를 알아야 돼?’···스타트업 갉아먹는 ‘사일로 현상’ 위험경보

입력 2021-07-13 13:51
수정 2021-08-06 09:34


[한경잡앤조이=강홍민 기자] #창업 3년차 제조업 스타트업의 대표 A씨는 지난해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시드투자유치에 성공했다. A씨와 대학 동기·후배 5명으로 출발한 이 회사는 시드투자를 기점으로 직원 수를 대폭 늘렸다. C레벨을 비롯해 팀장급, 인턴사원 등 기존 창업멤버 수보다 3배 이상 늘렸고, 사무실도 좀 더 넓은 곳으로 이전했다. A씨는 공격적인 자본과 인력 투입으로 자연스레 그려질 청사진만 꿈꿨다. 하지만 조직 내 인원이 많아지면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업무 분업화는 됐지만 서로 간 소통의 부재가 문제였다. A씨는 주간회의를 비롯해 팀장급 회의 등 소통 창구를 곳곳에 마련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팀별, 각 개개인의 소통 부재가 심각해지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소통이 없으니 자연스레 이슈 공유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창업 멤버와 투자 이후 채용한 인원들 간 불화도 문제였다. 결국 준비하던 서비스 론칭에 차질이 생겼다. A 대표 역시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딱히 없었다. 그러다 오랜 시간 함께했던 창업멤버가 퇴사를 결정하면서 불화의 고리는 걷잡을 수 없게 됐다.


‘사일로 현상’으로 존폐 위기를 겪는 스타트업이 늘고 있다. 비단 스타트업만의 문제는 아니다. 인간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사일로 현상은 조직, 기업을 갉아먹는 암세포로 불린다. 사일로 현상이란, 곡물을 보관하는 창고 ‘사일로’에 단단한 벽을 두르고 남들이 곡식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현상을 뜻한다. 이러한 창고를 만드는 것처럼 회사 내에서 다른 팀(동료)과 벽을 세워 자기 팀(개인)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서로 협력관계임에도 불구하고 협력하지 않고 공동의 목표보다 팀(개인)의 손해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사일로 현상이 기업 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 현상을 방치할 경우 그 기업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특히 스타트업에서의 사일로 현상은 치명적인 경영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 적은 인원에서 출발하는 스타트업의 특성상 갑작스레 조직이 커지고 인원이 늘어나면서 서로 소통이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더러 발생한다. 일각에서는 90년대생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스타트업의 경우, 개인주의 등 MZ세대의 특징이 업무에 고스란히 나타나 사일로 현상을 부추긴다는 지적도 있다. 특히 초기 창업에서는 필요하지 않았던 사내 규칙이나 인사 시스템이 성장가도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세팅되다보면 소통의 고리는 끊어지게 되기 십상이다.



“내가 왜 옆 팀 돌아가는 사정을 알아야 돼?”
개인주의가 시발점인 ‘사일로 현상’
사일로 현상의 첫 단계는 다른 팀 또는 팀원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를 때 발생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이 하는 일이 궁금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일만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 사일로 현상이 일어난다. 사일로 현상이 발생하는 회사의 특징을 보면 다른 직원들이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회사 내 팀별 업무 공유시스템이 잘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투자 중계 스타트업을 운영 중인 H대표는 “조직 내 2명만 있어도 사일로는 발생한다”며 “대표는 우리 회사는 소통이 잘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분명 사일로는 존재할 것”이라고 말했다.

스타트업 10곳 중 7곳 ‘사일로 현상 존재해’
한경잡앤조이에서 스타트업 CEO 90명을 대상으로 ‘사일로 현상’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사내 사일로 현상이 있나’라는 질문에 ‘있다(70%)’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 이어 ‘없다26.7%)’, ‘잘 모르겠다(3.3%)’순이었다. ‘사일로 현상이 언제 발생했나’라는 질문에는 ‘창업 후 1년 이내’, ‘창업 후 1~2년 사이’, ‘창업 후 3~5년 사이’가 26.9%로 동일하게 집계됐으며, ‘창업 후 2~3년 사이(19.2%)’가 뒤를 이었다.

스타트업에서의 사일로 현상은 어떤 식으로 발생했을까. 설문에 참여한 B 대표는 “조직이 커지면서 부서 간의 업무 분장이 명확해지기 시작했지만 모든 업무를 정확하게 분장하기 힘들었다”며 “업무 중요도와 관계없이 애매한 업무로 인해 부서 간 이기주의가 발생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C 대표는 “각 부서 간 소통 부재로 인해 비즈니스 모델인 서비스 품질 저하로 이어졌다”고 털어놨으며, D 대표는 “인원이 늘기 시작하면서부터 팀별 집단행동을 하기 시작했다”며 “집단행동으로 인해 하나의 메시지를 공유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프로젝트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맨파워로 뭉친 스타트업? 업무 회피, 전가(轉嫁)에 막장 드라마가 현실
인공지능 플랫폼 개발사인 E 대표는 최근 발생했던 사내 사일로 현상 목격담을 털어놨다. 평균 연령 29세로 90년대생 대표와 팀 리더들이 주축을 이룬 이 곳은 대학 창업동아리에서 출발한 스타트업이다. 대학시절부터 함께한 창업멤버와 대기업, 유니콘 기업에서 경력직으로 이직한 이들도 있었다. 멀리서 보면 맨파워로 똘똘 뭉친 비전있는 스타트업으로 보이지만 사실 안을 들여다보면 매일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지는 곳이라고 E대표는 설명했다. 얼마 전 운영 중인 서비스에 문제가 생겨 팀 리더 간 화상 회의를 진행한 E대표는 회의에서 서로 언성을 높이며 얼굴 붉히는 일이 목격했다.

일을 하다보면 서로의 의견 개진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토론하는 것은 당연지사, 기업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니 각자 다른 팀에 책임을 전가하는 발언만 내세우고 있었다고 E 대표는 설명했다. E 대표는 “내가, 우리 팀이 왜 이 일을 맡아야하냐, 다른 팀에서 맡아야 된다는 책임 전가하는 발언까지 쏟아졌다”며 “한 마디로 서로가 어떻게 하면 일을 안 할지에 대한 토론을 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스타트업 대표들이 직접 경험한 사일로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설문에 참여한 D대표는 “대표의 정확한 생각과 지표를 중간 관리자와 팀원에게 자주 소통하는 것을 추천한다”며 “회사의 큰 그림에서 이 일을 왜 하는지를 누차 설명하고 도출된 내용을 합의해 일을 시작하니 효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스타트업 대표는 “최근 ‘90년대생이 온다’라는 말이 생긴 것처럼 회사 내 조직과 개인 이기주의가 빈번히 발생할 수 있다”며 “처음부터 명확한 업무 분장이 쉽진 않지만 꾸준히 다듬어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문제를 일으킨 직원을 퇴사하도록 유도했다’, 결국 사일로 현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후 서비스 지역을 줄이고 팀을 최소화했다‘, ’직원들 개별상담을 했지만 결국 줄줄이 퇴사했다‘고 답한 스타트업 대표들도 있었다.

‘스패닝 사일로(2009년)’를 출간한 데이비드 아커 교수는 사일로 현상은 현대 기업이 풀어야할 핵심 과제라고 말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사일로 현상은 각 부서의 독단적인 행동을 부추긴다“며 ”사일로가 활개치기 시작하면 기업 전체의 성과보다 자신이 속한 부서의 성과 극대화에만 열을 올리는 기업문화가 나타난다“고 말했다. 여기에 사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보상 체계, 직무 평가제도 자체를 완전히 뜯어고쳐야 한다. 경영진은 커뮤니케이션, 협력 수준, 팀워크, 팀 차원의 해결책 등을 모두 고려해 보상을 실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kh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