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하지만 전란의 실상을 제대로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한 줌의 고유명사, 선조의 몽진(蒙塵)이나 일본 교토에 있는 귀 무덤처럼 흔히 떠올리는 대중적 이미지의 겉꺼풀을 벗겨내면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이 뒤얽혀 싸웠던 대사건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일천하기 그지없다.
《임진왜란》은 전근대 시대 동아시아 최대 국제전쟁을 국제정치학자의 시각에서 촘촘하게 정리한 통사(通史)다. 본문만 700쪽이 넘고, 참고 문헌과 각주가 2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철저하게 ‘전쟁이 발발해 진행되고,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지루한 협상 끝에 종전에 이르기까지’의 조선과 일본, 명나라의 정책 결정 및 외교 접촉 과정에 집중한다.
흔히 접하던 전쟁사·전투사 측면의 설명은 물론 주요 인물 중심의 ‘이야기로서의 역사’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선행 연구에 대한 소개도 생략되고, 임진왜란이 끼친 경제·사회적 변화와 왜군의 한반도 장기 주둔을 위한 행정정책 같은 전통적인 역사학계의 접근법에도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주제의 선택과 집중 못지않게 도드라지는 것이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저자만의 뚜렷한 시각이다. ‘2년 전쟁, 12년 논쟁’이라는 부제부터 논쟁적이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의 ‘7년 전쟁’으로 간주하던 통념과는 결을 달리하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다. 조선과 명나라, 일본이 전투를 벌인 기간은 2년 정도에 불과하지만 상호 비군사적으로 접촉한 기간이 훨씬 길었다는 이유에서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임진왜란의 시작점을 1589년 6월 대마도주의 조선 방문으로, 전쟁의 종료 시점은 명군이 철수한 1600년 9월로 잡는다.
책은 당대의 사료가 전하는 목소리를 가감 없이 전한다. 현대의 민족주의 관점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사대주의, 중화와 이적의 외피를 뚫고 드러난 속살은 현실주의다. 각국은 저마다의 처지와 이익을 최우선에 놓고 행동했다. 명분과 레토릭, 현실은 필요에 따라 같이 가기도, 따로 가기도 했다. ‘조공체제’는 이미 당대 역사 참여자들로부터 빈껍데기 취급을 받았다.
당연하게도 속고 속이는 것은 상수였다. 머나먼 전장의 소식과 외교 교섭의 결과는 항상 뒤늦게, 불확실하게 전해졌다. 의심과 불신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과 내통해 공격할 것이라는 의심을 오랫동안 버리지 못했다. 많은 부담을 지면서까지 조선을 보호해야 할 ‘전략적 가치’가 있는지를 두고 명 조정에선 이견이 끊이지 않았다. 조선도 명과 일본이 결탁해 조선을 분할할 가능성에 전전긍긍했다. 명군의 규모와 전투력을 불신하고 그들이 떠나길 바라면서도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내부와 외부를 향한 거짓말은 진실보다 흔했다. 공적은 과장됐고, 피해는 축소됐다. 조선과 명이라는 우방국 간의 공식 외교문서에도 감추고자 하는 것이 더 많았다. 국서와 사신 파견조차 왜곡과 조작의 대상일 뿐이었다. 조선과 일본, 일본과 명나라 간 접촉은 허풍과 멸시, 무리한 요구, 실무자 선에서 이뤄진 뒷거래로 점철됐다. 자연스럽게 교섭 과정에 끼어든 것은 심유경이나 소서비(나이토 조안) 같은 무뢰배들이었다.
저자의 ‘해석’은 이처럼 기존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연구와 결이 다르지만, 주장은 철저하게 원사료에 근거하고 있다. 저자는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과 《명사》(신종실록), 《징비록》 같은 기존에 많이 활용됐던 자료 외에도 명과 일본의 속내를 살펴보고 기존 사료를 ‘더블 체크’할 수 있는 자료를 다수 원용했다. 형개의 《경략어왜주의(經略禦倭奏議)》, 송응창의 《경략복국요편(經略復國要編)》 같은 중국 사료와 중세 일본어로 적힌 다이묘 가문 출간 문서 모음이 대표적이다.
상세한 중국 내부의 공론 과정 소개와 달리 일본 내부 동향은 상대적으로 평면적으로 서술됐다는 인상을 주는 점은 아쉽다. 일본 인명은 성과 이름을 모두 적시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인 데다 성이 아니라 이름만으로(‘고니시 유키나가’를 ‘유키나가’로 표기하는 식) 지칭하는 것도 문제다. ‘아베 신조’를 ‘신조’라고 부르는 서술 방식은 명료함과 신뢰성 측면에서 득보다는 실이 많아 보인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