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유럽 ESG 최전선
지난 3월 독일에서 통과된 ‘공급망법(Lieferkettengesetz)’으로 중국 내 독일 기업들의 지각변동이 예상된다. 중국 신장 지역 위구르족 탄압과 강제노동 의혹이 공급망법을 계기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글로벌 공급망 전반에서 인권 존중을 의무화한 이 법안으로 중국 내에서 활동하던 독일 기업에 ‘비상’이 걸렸다.
독일 연방의회는 지난 6월 11일 공급망법을 통과시켰다. 글로벌 공급망에서의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목적이다. 2023년부터 독일 기업들은 자사 글로벌 공급망에서 아동노동, 강제노동 등 인권침해 요소가 있는지 주의를 기울이고 이를 개선할 의무를 진다. 공급망법을 위반한 기업에는 10만 유로에서 80만 유로의 벌금을 부과한다. 연간 매출액이 4억 유로 이상인 경우에는 연간 매출액의 최대 2%까지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 3년간 공공 사업 입찰도 금지된다.
독일 산업계는 공급망법에 우려를 표시해 왔다. 독일 고용주연합과 가족기업연합 등 경제계 단체는 법률안 통과 마지막까지 반대 의사를 밝혔다. 법률안 초안에 있던 민사책임이 최종안에 빠진 것도 경제계의 적극적인 로비 결과로 알려졌다.
폭스바겐, “무조건 철수가 해법 아니다"
독일 공급망법과 함께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일 기업들이 큰 비판에 직면했다. 신장 위구르족 인권침해 의혹을 받고 있는 지역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폭스바겐은 중국 기업 SAIC와 합작해 2013년부터 신장에 공장을 운영해 왔다. 직원 650여 명 규모이며, 중국 시장에 판매하는 모델을 1년에 5만 대 생산한다. 화학 기업 바스프(BASF)도 현지에 조인트벤처 형식으로 화학제품 제조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직원은 200여 명 규모다.
신장 지역의 인권침해 논란은 수년 전부터 꾸준히 제기된 문제다. 특히 지난해 3월 호주 싱크탱크인 전략정책연구소(ASPI)의 관련 보고서로 독일 기업들이 도마에 올랐다. 중국 현지의 독일 기업들은 이런 의혹을 부인해 왔다. 슈테판 푈렌슈타인 폭스바겐 중국 대표는 당시 독일 공영방송 ARD와의 인터뷰에서 “보고서 관련 내용을 검증하고 다른 공급업체도 점검했다”면서 “신장에서 슬쩍 철수해버리는 것은 우리 600명 노동자와 가족들의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으며,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바스프 측도 강제노동은 없으며 기업의 행동강령을 준수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문제는 지난 5월 16일 독일 일간지 쥐드도이체차이퉁(SZ)의 보도로 다시 수면 위로 올랐다. SZ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연방의회 학술조사실 보고서를 인용해 “위구르족에 대한 심각한 인권침해 때문에 신장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독일 기업들의 활동이 제한되거나, 공장을 완전히 철수할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아디다스, 퓨마, BMW, 보쉬, 지멘스, 폭스바겐, 바스프 등 독일 주요 기업의 공장이 위구르족의 재교육 수용소와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 보고서는 “신장 위구르인에 대한 대우는 유엔의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 제2조 5개 조항이 모두 해당된다”고 주장했다.
해당 연구를 의뢰한 녹색당 소속 마가레테 바우제 연방의원은 “신장에서 활동하는 독일 기업의 책임이 어느 때보다 분명해졌다. 그들 스스로 강제노동자를 고용하지 않았다고 해도 (중국) 국가의 억압정책으로 형성된 유리한 시장 조건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며 “독일 기업은 이런 상황에서 신장과 비즈니스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지 진지하게 자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 내 자사 공장에 강제노동이 없더라도, 하청 기업에서 강제노동이 이뤄진다면 결국 원청 기업도 시스템의 이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청 기업의 인권 문제까지 주의 의무를 기울이고 개선하라는 것이 바로 공급망법의 취지다.
중국에 있는 독일상공회의소는 지난 6월 17일 ‘중국의 지속 가능 공급망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배포했다. 독일 공급망법이 통과된 지 6일 만이다. 기업 내 전담조직이나 규정이 없는 독일 중소기업을 위해 공급망법에 따라 확인해야 할 주요 이슈와 기업이 세워야 할 가이드라인 샘플 텍스트를 제공했다. 기업과 공급업체가 함께 최소 1년에 한 번 위험분석을 수행하고, 경영진에게 회사의 지속 가능 전략에 대한 정책을 공개하라고 권고했다.
환경 의무 더해진 EU 공급망법 추진 중
독일 경제 전문 저널리스트 베른트 치제메어는 “중국 공급망에서 오는 비용 이점에도 불구하고 독일 기업들이 ‘조용히’ 공급망 다각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경제 잡지 카피탈(Capital)에 실린 칼럼에서 “공급망법 논쟁에서 사람들은 방에서 200kg의 고릴라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움직인다. 진짜 문제인 중국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중국 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독일 기업들이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독일 공급망법은 유럽연합(EU) 공급망법의 ‘초안’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독일 법안이 먼저 인권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면, EU 법안은 환경적 의무가 더해져 더욱 강력해질 전망이다. 기업에 대한 부담은 물론 저소득 국가에도 피해가 갈 것이라는 우려도 물론 있다. 아동노동이나 강제노동 등은 중국뿐 아니라 대부분 저임금 국가에서 발생한다. 공급망법에 부담을 느낀 독일 기업들이 저임금 국가의 공급업체를 줄인다면 그곳 노동자의 상황은 더욱 열악해진다. 폭스바겐 중국 대표가 말했던 논리와 비슷하다.
하지만 독일이나 EU나 공급망법이 필요하다는 데는 이미 합의된 분위기다. 특히 서구 국가의 번영을 떠받치고 있는 가난한 국가들에 대한 책임의식이 상당히 높아졌다. 독일에서도 “10년 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는 말이 나온다. 강제노동이나 아동노동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저임금 국가가 해결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인권침해로 형성되는 저렴한 임금은 글로벌 기업을 끌어들이는 매력적인 요소가 된다. 해당 국가가 이를 해결할 리 만무하다. 여기에 그간 기업에 맡긴 ‘자율성’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게 드러났다. 기업에 법적 의무를 부과한 건 그래서다. 이제는 ‘하면 좋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 됐다.
베를린(독일) = 이유진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