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ESG NOW
SK하이닉스는 최근 협력사들의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경영을 지원하기 위해 1000억원 규모의 ‘ESG 펀드’를 조성했다. 올해 협력사 상생을 위해 마련한 3000억원 규모의 예산 가운데 3분의 1을 ESG 지원을 위해 편성한 것이다.
협력업체들이 ESG를 개선할 때 필요한 비용을 시중보다 낮은 이자로 빌려주기 위한 목적이다. 에너지 저감 설비나 오염물질을 걸러주는 장치 등을 구축할 때 드는 비용을 중소기업이 부담하기에는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는 IBK기업은행과 ‘ESG 펀드’를 조성했고, KDB산업·NH농협·하나·우리은행과도 협약을 맺었다. 이에 더해 무상 컨설팅 프로그램에서도 ESG 컨설팅을 대폭 강화하기로 했다.
국내 대기업들이 협력사 ESG 챙기기에 나섰다. 확 달라진 경영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협력사들을 돕겠다는 것이 주요 기업의 공통된 설명이다. 공급망 전체의 ESG 수준을 끌어올리겠다는 목적도 있다. 우태희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은 “중소기업이 ESG 경영을 실천하기에는 비용과 정보의 벽이 높다”며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ESG 경영을 돕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교육 컨설팅 지원도 활발
기업들은 우선 협력사의 ESG 정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협력사의 ESG 경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평가 지표를 개발하고 있다. 협력사들의 장단점을 구체적으로 파악해야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올해 안에 협력사별로 필요한 ESG 지원이 무엇인지를 조사해 상생 계획을 수립할 계획”이라며 “금융 지원, 경영 컨설팅 등 가능한 수단을 총동원해 ‘맞춤 처방’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협력사 리스크 통합관리 시스템인 ‘G-SRM’을 운영 중이다. 협력사에 문제가 발생하면 즉각 대응에 나서겠다는 의미다. 2500여 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한 스마트 공장 구축 지원 사업도 ESG 경영과 관련이 있다는 설명이다. 생산 공정을 전산화·고도화하면 ESG 관련 사고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포스코건설도 ‘포스원’으로 불리는 협력업체 정보공유 시스템을 구축했다. 포스원의 역할은 G-SRM과 비슷하다. 협력사의 공사 계약 내역, 납기 일정 등의 정보를 들여다보고 문제가 될 만한 요소가 있는지를 찾아낸다.
협력사를 대상으로 교육과 컨설팅을 벌이는 기업들도 많다. LG전자는 지난 6월 초 250여 개 협력사를 대상으로 안전사고 예방교육을 진행했다. 화재·안전, 작업 환경 등 여러 분야의 내외부 전문가들이 협력사를 찾아가 안전관리 우수 사례를 소개하고 ESG 경영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LG전자는 올해 주요 협력사들을 대상으로 ESG 분야를 스스로 점검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외부 전문 인증기관과 연계해 컨설팅을 지원하기로 했다.
체계적인 ESG 컨설팅을 위해 외부 기관과 손을 잡기도 한다. 롯데하이마트는 동반성장위원회와 함께 ‘협력사 ESG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다. 올해 말까지 동반위가 운영하는 중소 파트너사 ESG 경영 구축 사업에 참여한다. 우수 중소 파트너사 20여 곳이 ESG 경영 역량을 강화하도록 돕는 게 이 사업의 골자다. 회사 측은 상품 제조, 물류, 홈케어 서비스 사업과 연관 있는 파트너사 중에서 안전·환경, 노동·인권 등 분야 경영 체계 개선을 희망하는 업체를 선정하고 있다.
이후 동반성장위원회가 개발한 ESG 표준 가이드라인을 기반으로 업태별 맞춤형 ESG 지표를 함께 구축할 계획이다. 중소 파트너사 임직원을 대상으로 ESG 교육도 시행하고, 파트너사별 ESG 경영 현장 진단을 실시한다. 이를 토대로 ESG 경영 현황 개선을 위해 전문가와 연계해 컨설팅과 평가를 진행한다.
한화솔루션은 기업 경영 평가기관인 이크레더블과 손잡고 중소 협력사에 ESG 경영 평가와 관련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이크레더블은 한화솔루션의 중소 협력사 24곳에 자체 개발한 ESG 평가 모형을 적용해 탄소배출량, 안전 보건, 회계 투명성 등의 항목을 점검한다. 결과에 따라 한화솔루션과 함께 해당 기업에 대한 ESG 교육 및 컨설팅도 지원할 계획이다.
한 대기업 ESG 담당 임원은 “글로벌 기업은 물론 기관투자가도 개별 기업이 아니라 공급망 전체의 ESG 수준을 평가하기 시작했다”며 “협력사에서 오염물질이 누출되거나 안전사고가 발생해 불이익을 당하는 상황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기준 미달하면 거래 끊어버리는 해외 기업들
글로벌 기업들은 국내 대기업보다 단호하다. 자체적으로 ESG 수준을 끌어올리지 못하면 협력업체와의 거래를 끊어버리는 방법으로 ESG 리스크를 회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스탠다드차타드(SC)그룹은 최근 글로벌 대기업의 지속가능경영 및 공급망 전문가 4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보고서를 공개했다. 응답자 중 15%가 “탄소중립 전환 계획에 차질을 줄 수 있는 공급업체와 거래를 중단하는 작업에 나섰다”고 밝힌 대목이 눈에 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의 애플이다. 애플은 지난 4월 전 세계 협력업체 110여 곳에서 탄소중립(탄소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것)을 달성하겠다고 선언했다. 한국에서는 SK하이닉스, 서울반도체 등이 탄소중립 협력사 명단에 포함됐다. 이 기업들이 애플과 거래를 이어가려면 온실가스 배출량을 획기적으로 줄여야 한다.
업계 관계자는 “애플 같은 글로벌 기업들은 계약 대상 기업뿐 아니라 그 회사가 거래하는 공급망까지 들여다본다”며 “국내 대기업 입장에선 싫든 좋든 협력업체의 ESG 경쟁력을 끌어올려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SC 측은 탄소를 줄이지 않는 공급업체와 거래를 중단하는 글로벌 대기업의 비율이 2024년 62%, 2025년 78%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이 같은 움직임의 불똥이 한국으로 튈 수 있다고도 했다. SC는 2030년 한국 공급업체들의 잠재적인 수출 손실 규모가 최대 1425억 달러(약 158조5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수빈 기자 ls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