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0만 개. 네이버쇼핑에서 ‘그릇’을 검색하면 등장하는 제품의 수다. 등록된 그릇 브랜드만 100개다. 소재도 고령토, 원목, 유리, 놋쇠 등 13개에 이른다. 가격대는 천차만별이다. 개당 수천원에 불과한 그릇이 있는가 하면 수백만원짜리 제품도 있다. 소비자의 다양한 기호를 겨냥한 상품이 현란할 정도로 쏟아져 나오는 그릇시장을 일컬어 ‘식탁 위의 패션쇼장’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영국산 ‘국민 그릇’의 등장우리나라 소비자들이 처음부터 개성 있는 스타일의 그릇을 선호한 것은 아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 가정에서 흔하게 쓰인 것은 단순한 민무늬 모양의 흰색 도자기 그릇이었다. 시장을 이끈 것은 한국도자기, 행남사(옛 행남자기), 젠한국 등 국내 브랜드였다.
국내 그릇시장 판도에 변화가 생긴 것은 2000년대부터다. 1994년 덴마크 왕실이 쓰는 도자기 브랜드 로얄코펜하겐이 국내에 진출했고, 이어 영국 도자기 브랜드 포트메리온 및 덴비, 독일 식기 브랜드 빌레로이앤보흐, 미국의 식기 브랜드 코렐 등이 줄줄이 국내에 발을 들였다.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 역시 국내 시장을 공략했다.
국내에서 보기 힘들던 이색적인 디자인의 해외 브랜드 그릇은 빠르게 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특히 주목받은 것은 포트메리온이었다. 나뭇잎 덩굴 테두리로 포인트를 준 ‘보타닉 가든’ 시리즈는 홈쇼핑에 나오는 족족 매진됐다. 포트메리온은 2010년대 주요 백화점·마트·온라인몰의 식기 매출 1위 브랜드로 자리잡으며 ‘국민 그릇’이라는 타이틀까지 얻었다.
SNS 스타 된 덴마크 수제 그릇최근 2~3년 사이에는 또 다른 바람이 불었다. 인스타그램 등 SNS가 유행하면서 여기에 올리기 좋은 브랜드 그릇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징은 크게 두 가지다. 아주 비싸거나, 아주 특색이 있거나다.
수작업으로 패턴을 넣은 덴마크의 로얄코펜하겐은 인스타그램에서 11만 개 이상 태그한 ‘스타 그릇’이다. 가장 많이 팔리는 블루플레인 패턴 27㎝ 그릇 기준 21만원으로 매우 고가지만, 소비자는 오히려 매력으로 받아들인다. 국내 소비시장의 잠재력을 인지한 이 브랜드는 2013년부터 한식 라인도 내놓고 있다.
국내에서 점진적으로 성장하던 로얄코펜하겐은 인스타그램 열풍을 타고 최근 ‘대박’을 터뜨렸다. 지난 1분기 로얄코펜하겐의 한식 최상위 라인인 ‘블루 하프 레이스’ 제품군 매출은 전년 동기보다 250% 늘었다.
‘음식을 돋보이게 하는 그릇’으로 알려진 이딸라도 강세다. 핀란드 유리공장에서 시작된 이 브랜드는 다양한 예술가와 협업한 유리 식기를 대표상품으로 앞세우고 있다. 유리 특성상 빛을 잘 반사하기 때문에 사진용 플레이팅에 최적화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덕분에 국내 인스타그램에서 4만 개 이상의 해시태그가 붙었다. 최근에는 유리공예 대가 오이바 토이카의 디자인으로 만든 ‘가스테헬미’ 시리즈가 지난 1~4월 전년 동기보다 약 두 배 더 팔리는 성과를 올렸다. 반격 나선 국산 브랜드국산 브랜드는 독특함을 앞세운 신제품으로 시장 방어에 나섰다. 1963년 설립한 국내 도자기 브랜드 광주요는 내부에 구슬을 넣어 흔들 때마다 맑은 소리를 내는 ‘소리잔’ 등 이색 상품을 출시해 젊은 층의 이목을 끌었다. 소리잔이 인기를 얻자 광주요는 방탄소년단(BTS), 브라운앤프렌즈 등과의 컬래버레이션 제품으로 소장가치를 좇는 이들까지 빠르게 사로잡았다.
흔치 않은 소재로 틈새시장을 뚫은 기업도 있다. 국내 도자기업체 죽전도예는 2014년 프리미엄 방짜유기 브랜드 ‘놋담’을 내놨다. 전통 그릇인 방짜유기를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제품이다.
국내 그릇시장은 앞으로 더 다채로워질 것이라는 게 식기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코로나19 여파로 집에서 요리하고 식사하는 ‘홈쿡(home cook)족’이 크게 늘었고, SNS에 자신의 식탁 풍경을 공유하는 2040세대가 급증한 영향이다.
윤희은 기자 so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