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이 여기서 왜 나와?…호주에 9곳의 'Kapyong'이 있다 [송영찬의 디플로마티크]

입력 2021-06-26 17:07
수정 2021-06-26 17:09
‘Kapyong Street(가평로)’, ‘Kapyong Bridge(가평교)’, ‘Kapyong Glade(가평 공원)’

이름만 봐서는 구글어스로 본 경기 가평군 같지만 모두 호주에 있는 지명들입니다. 호주 전역의 9개 지역에서는 이처럼 이름에 ‘가평’이 들어간 도로와 다리들이 발견됐습니다. 호주 최대 도시 시드니에는 3곳의 ‘가평 길’이, 애들레이드에는 ‘가평 다리’, 콥스 하버에는 ‘가평 공원’이 있었습니다.

호주의 한인잡지 크리스찬리뷰의 권순형 발행인은 지난달 호주 전역의 가평 관련 지명을 직접 찾아 공개했습니다. 권 발행인은 “가평 길은 한국전쟁 당시 가평전투에 참전했던 용사들이 많이 거주했던 곳에 생긴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고 밝힙니다.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먼 땅에서 목숨을 바쳤던 참전 용사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가평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치열했던 가평 전투와 영연방군 1951년 4월 시작된 가평 전투는 6·25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꼽힙니다. 가평 전투에서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로 구성된 영연방군이 중공군과 맞붙습니다. 영연방군은 5배가 넘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던 중공군에 맞서 방어선을 수호하는데 성공합니다. 이틀 밤을 꼬박 새운 치열한 전투 끝에 영연방군은 중공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고지를 지켜냅니다. 당시 영연방군이 중공군의 남하를 3일간 막아냈기 때문에 유엔군이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25일 6·25전쟁 71주년을 맞아 찾은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는 가평 전투 관련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전쟁기념관 3층 유엔실에 들어서자 치열했던 가평 전투의 생생한 사진들이 걸려있었습니다. 당시 캐나다군의 군복과 생존한 참전 용사 분들의 사진들도 걸려있었습니다. 6·25전쟁을 기억하며 찾은 많은 관람객들은 작은 공간임에도 이곳에서 한참을 떠나지 못하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달 말까지 전시되는 이번 사진전은 주한 캐나다대사관에서 마련했습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참전용사들의 방한이 어렵게 되자 캐나다가 가평전투 70주년을 맞아 함께 싸운 연대의 정신과 자국 참전용사들에 대한 존경을 담아 준비한 것입니다. 한인 최초의 캐나다 연방 상원의원인 연아 마틴(한국명 김연아·56·사진) 의원은 지난 4월 SNS에서 가평 전투 70년을 알리는 캠페인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6·25전쟁 당시 30만명 이상을 파병하고 현재도 한국의 안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미국에 가려 많은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하지만 영연방 국가들도 한국에 엄청난 병력을 파병합니다. 파병 규모는 영국이 1만4298명, 캐나다가 6146명, 호주가 2282명, 뉴질랜드가 1385명에 달합니다. 전사한 곳에 유해를 안장하는 영연방의 문화에 따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는 영연방 4개국의 1579분의 참전용사 유해가 안장돼있습니다. 기억해야할 6.25전쟁 71주년 지난 22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도 뜻깊은 행사가 치러졌습니다. 바로 2009~2016년 사이 발견된 전사자 3위(位)의 유해에 대한 합동안장식입니다. 세 분 중에는 2015년 경기 가평군에서 발굴된 전원식 일병도 있었습니다. 전 일병은 1951년 2월4일 26세의 나이로 아내와 두 살배기 딸을 두고 참전해 가평 전투에서 전사하셨습니다. 전 일병의 동생 전춘식(83)씨는 이날 “형님의 유해를 찾아준 관계자들에게 너무 감사하다”며 “후손들이 자랑스러워하겠지만 평생 일만 죽어라 하다가 군에 가서 전사한 형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말합니다.

이날 전 일병 외에도 두 분의 참전용사가 대전현충원에 안장됩니다. 고인들의 신원은 발굴 이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진행한 유전자 시료 채취에 참여한 유가족들의 유전자 정보를 통해 확인됐습니다. 반철환 하사는 1951년 3월 27세의 나이로 둘째를 임신한 아내를 뒤로한 채 입대해 막내딸 얼굴은 한 번도 보지 못하고 1951년 8월24일 강원 인제군 일대에서 벌어진 노전평 전투에서 전사하셨습니다. 손중철 일병은 1950년 11월4일 20세의 나이로 결혼한 지 1년여 만에 아내와 어린 아들을 두고 참전해 포항지구 전투에서 전사하셨습니다.


하지만 6.25전쟁은 점점 '잊혀진 전쟁'이 돼가고 있습니다. 지난 21일 여론조사기관 데이터리서치가 쿠키뉴스의 의뢰로 진행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국 만 18세 이상 남?여 1000명에게 ‘6?25전쟁이 남침이라고 생각하느냐, 북침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응답자의 33.9%가 “6?25전쟁은 북침”이라고 답변했습니다. 남침이라고 옳게 응답한 비율은 54.5%에 불과했습니다. 같은 응답자들에게 질문을 바꿔 ‘6·25전쟁을 누가 일으켰냐’고 물었더니 남침과 북침의 용어를 혼동한 사람이 많았던 탓인지 90.7%가 북한이 일으켰다고 대답했지만, 여전히 ‘남한’이 일으켰다는 답변도 1.8%가 나왔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에서도 6·25전쟁이 북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가운데 중국에서는 조직적인 6·25전쟁 역사 왜곡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리진쥔 주북한 중국대사는 지난 21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 2주년을 맞아 북중 친선을 계승하고 발전해나가겠다고 강조하며 북한 노동신문에 기고문을 게재하고 "중·조(북·중) 외교관계 설정 70돌이 되는 중요한 시기에 두 당, 두 나라 최고영도자들 사이의 역사적인 호상 방문이 실현되었다"며 "전통적인 중·조 친선은 민족적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불길을 헤쳐왔으며 정의로운 항미원조의 전화 속에서 더욱 굳건해졌다"고 말했습니다.

중국이 6·25전쟁을 지칭하는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맞서 북한을 도움)’는 말 그대로 미국의 침략에 중국이 북한을 도왔다는 뜻으로 용어 자체가 왜곡입니다. 전쟁 발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죠. 설상가상으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해 10월 국가주석으로서는 20여년만에 처음으로 6·25전쟁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항미원조 정신은 귀중한 정신적 자산이고 강대한 적들에게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강조하기까지 했습니다.

지난 2월 인터뷰한 한 참전용사의 유족의 말씀이 여운에 남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이 분은 “미디어에서도 6·25전쟁의 실상과 이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에 대해 다루는 것이 금기시돼버린 것 같다”며 “젊은 세대가 보훈에 대해 잘 모르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습니다. 북한과 중국의 조직적인 6·25전쟁 왜곡 속에서 전쟁의 참상과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전사한 국군과 유엔군의 참전 용사들은 잊혀지고 있습니다.

송영찬 기자 0fu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