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정부의 '포스트 코로나' 정책 부재가 얼마 남지 않은 일본의 강점들마저 망가뜨리고 있다고 일본을 대표하는 싱크탱크가 강하게 비판했다.
야지마 야스히데 닛세이기초연구소 수석 이코노미스트(사진)는 지난 18일 일본외신기자센터(FPCJ) 주최로 열린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스가 내각의 양대 핵심정책인 디지털화와 탈석탄화의 허구성과 미중 패권전쟁에 대응하는 일본의 모순된 전략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지정학적 입지와 산업구조 측면에서 일본과 비슷한 고민에 빠진 우리나라에도 고스란히 적용할 수 있는 지적들이었다.
◇"스가, 내년 7월 선거까지 안 움직일것"
야지마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스가 내각이 핵심정책으로 내건 디지털화와 탈석탄화는 세계 주요국은 물론 과거 일본의 정권이 추진하던 정책과 차이가 없다"며 "생산성을 높여 잠재성장률 하락을 막는 것이 시급한데 정작 이에 대한 대책은 빠져 있다"고 말했다.
야지마 수석은 "코로나19가 수습되면 언제까지 어떤 정책을 통해 어떤 수치를 성취할 지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며 "그런데도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한 건 온실가스 실질 배출량을 0으로 줄인다는 30년 뒤의 목표가 유일하다"고 지적했다.
부실채권 급증, 중소기업의 도산위기, 지방 경제 피폐화 등 일본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손대야 하는 과제는 일부러 외면하고 있다고도 했다. 지지율에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다.
대신 핸드폰 요금과 불임치료비 인하, 디지털청 설립 등 눈에 띄기 쉬운 정책만 앞세우고 있다. 야지마 수석은 "장기집권을 위한 선거전략"이라며 "내년 7월 참의원(일본 상원) 선거까지는 구조적인 문제 해결에 손대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코로나19 확산을 계기로 디지털 부문에서 일본의 후진성은 여과없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디지털화에서 의외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는게 야지마 수석의 진단이다.
가까운 미래에 인류의 생활양식을 지배할 '디지털 현실세계(Digital Real)' 분야가 대표적이다. 디지털 현실세계란 5세대 이동통신(5G)과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AI)과 같은 디지털기술과 데이터를 결합해 일상생활과 산업 전반에 걸쳐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랫폼을 말한다. ◇'풀패키지'형 산업구조 디지털리얼의 강점자동운전에 의한 통합모빌리티 서비스(MaaS) 물류, 무인점포, 각종 정기구독형 서비스, 개인특화 의약품, 스마트 공장 등이 해당한다. 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기술은 기본이고 관련 제조업과 서비스업을 많이 보유한 나라일 수록 유리하다.
야지마 수석은 "일본은 디지털 현실세계 실현을 위해 필요한 기술과, 제조업, 서비스업을 모두 가진 세계에서 몇 안되는 나라"라고 분석했다.
지금까지 일본은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종류가 너무 많고 영세적이어서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디지털 현실세계에서 일본의 '풀 패키지'형 산업구조는 강력한 경쟁력이라는 설명이다. 정보기술(IT) 분야에서 강점을 갖고 있으면서 제조업과 서비스업을 두루 갖춘 우리나라도 디지털 현실세계의 강자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야지마 수석은 하지만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과 디지털 리얼세계를 선점하려는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5G와 IoT 기술을 사회 전반으로 확산시키는 한편 산업구조를 소비자 중심으로 재편하는 과제 해결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야지마 수석은 "앞으로 소비자는 어떤 기업의 제품이냐보다 자신에게 필요한 서비스와 제품이냐를 더 중시할 것"이라며 "수많은 업체가 난립해 공급자의 시각에서 제품을 쏟아내는 일본의 산업구조로는 경쟁에서 이기기 어렵다"고 말했다.
탈석탄화 실현에 가장 중요한 과제인 국제 규정을 선점하는데도 일본은 선수를 빼앗겼다는 지적이다. 한발 앞서 탄소세 등을 도입한 유럽연합(EU)이 탈석탄시대의 국제 규범을 주도하고 있다. 국제 규범을 만드는 과정에서 일본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단은 중국에 빼앗겼다.
현재 국제연합(UN) 등 15개 주요 국제기구의 사무총장 가운데 일본인은 한 명도 없다. 반면 중국은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FAO),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국제연합 공업개발기구(UNIDO), 국제전기통신연합(ITU) 등 4곳의 최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경영이 대세로 자리잡으면서 일본 기업은 더욱 코너에 몰리고 있다. 장치산업 중심의 산업구조가 초래한 낮은 생산성과 자기자본이익률(ROE)이 시장의 외면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스가 내각은 탈석탄화 정책을 내걸면서 30조달러(약 3경4000조원)로 추산되는 글로벌 ESG 투자자금을 유치해 일본의 경제성장으로 연결시키겠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야지마 수석의 지적대로 구체적인 대책이 빠져 있어 세계 시장의 일본 홀대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야지마 수석은 "글로벌 자금이 일본을 저평가하면서 일본의 기관 투자자금도 일본 시장을 이탈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日정부 모순된 정책이 기업의 족쇄경제안전보장과 관련해서는 정부가 오히려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 지난 4월 미일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은 대만과 공동으로 세계 반도체 공급망을 재구축하기로 합의했다. 세계 시장에서 날로 존재감이 커지는 중국을 겨냥한 조치였다.
야지마 수석은 일본의 무역상황과 반대로 가는 모순적인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일본의 수출에서 중국의 비중이 크게 높아지는 반면 미국과 EU의 비중은 크게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일본의 수출에서 중국의 비중(15.9%)은 미국(12.4%)과 EU(6.4%)를 합한 수준까지 커졌다.
특히 중국 수출품목 1~2위가 반도체 제조장치와 반도제 전자부품(합계 12.7%)이었다. 수입품목 1~2위도 통신기기와 전산 주변기기(합계 22.8%)였다. 중국과 반도체 관계가 깊어지고 있는데 미국과 반도체 공급망을 재편하는 모순적인 정책이 튀어나온 것이다.
야지마 수석은 "민간기업은 수익이 나는 곳, 경쟁에서 이길 것 같은 곳으로 움직이기 마련인데 국가가 정한 경제안전보장의 틀이 오히려 제약요인이 됐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올해 일본 정기국회에서 여당과 야당은 경제안보 문제에 대한 깊이있는 논의를 회피했다고 야지마 수석은 비판했다. 자민당이 뒤늦게 정부 산하에 싱크탱크를 만들겠다는 방안을 내놨지만 설립시기가 내년 이후여서 너무 늦다는 지적이다.
야지마 수석은 "일본 정부가 동맹국인 미국과 최대 교역상대국인 중국 사이에서 대처방안을 정리해 주지 않으면 일본 기업은 미국과도, 중국과도 거래를 못하는 상황에 놓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닛세이기초연구소는 : 일본 최대 생명보험사인 일본생명이 창립 100주년을 맞아 1988년 설립한 대표 싱크탱크다. 경제·금융·재정정책을 비롯해 고령화 사회와 사회보장, 연금 분야의 과제를 중립적인 입장에서 문제해결에 중점을 두고 연구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야지마 야스히데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 1968년생으로 1992년 도쿄공업대학을 졸업했다. 저출산·고령화, 글로벌화에서의 기업경영과 혁신, 중앙은행 금융정책, 재정문제 등에 대해 자신 만의 목소리를 논리정연하게 내는 학자로 호평 받는다. 이 때문에 각종 방송 프로그램과 인터뷰에 단골로 초대된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